항목 ID | GC04217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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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佐洞金寧金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Gimnyeong Gim clan in Jwa-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에 있는 김녕 김씨 세거지.
[개설]
김녕 김씨(金寧金氏)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39세손이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다. 김시흥의 아버지는 동정공 김봉기(金鳳麒)의 넷째 아들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하여졌으며,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이에 그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다가 고려 후기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로왕(金首露王)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 김녕으로 본관을 확정하였다.
김녕 김씨 충의공파(忠毅公派) 9세손인 김문기(金文起)는 이조 판서 김관(金觀)의 아들로, 단종 복위 거사의 주역이었으나 그 공적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묘역에 가묘를 마련하면서 그 충절을 알리게 되었다. 김문기의 가문은 부자와 함께 손자 김충주(金忠柱), 증손자 김현남(金玄南), 현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충효의 맥을 이어 와서 전대미문의 5세 충효 정각(五世忠孝旌閣)이 세워졌다.
[명칭 유래]
좌동은 장산에서 흘러내리는 춘천의 왼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왼 좌(左)’ 자를 썼으나 지금은 ‘도울 좌(佐)’ 자로 변경되었는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형성 및 변천]
김녕 김씨 16세손 김복(金福)의 아버지가 김흥국(金興國)이다. 충청도 옥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학문과 무예를 아울러 연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옥천에서 동면 해운대 좌동 마을로 입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복은 동래성으로 달려가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분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는 성을 뛰어넘어 소산 전투[금정구 선두구동, 브니엘고등학교 앞 소산 고개]의 김정서 의병장과 합세하여 유격 전술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또 창녕 화왕 산성 전투에 가담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 원종 2등 공신의 녹권을 하사받았고, 1669년(현종 10) 어모장군 훈련원 정에 증직되었으며 임진왜란 24공신인 별전공신으로 충렬사에서 봉사하고 있다. 김복의 묘소는 장산 기슭 도산소(都山所)[해운대구 좌동 산96-1번지]에 있다.
[자연 환경]
좌동은 북서쪽으로는 구곡산이, 북동쪽으로는 부흥봉이 자리하며, 남쪽에는 농경지로 이용되던 넓은 평지인 장자벌이 있었다.
[현황]
2013년 현재 좌동에는 김녕 김씨 7가구가 살고 있고, 해운대 지역에는 10여 가구,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는 60여 가구가 산다. 2003년 ‘김녕김씨충의공파휘복후문중회’ 재실을 건립하였는데, 전통 양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금복 빌딩 7층에 위패 50위를 모시고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린다. 참석자는 60여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