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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동 사암 마을 남원 양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409
한자 菉山洞四岩-南原梁氏世居地
영어의미역 Noksan-dong Namwon Yang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녹산동 사암 마을 남원 양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었던 남원 양씨 세거지.

[개설]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는 제주도에 탐라국(耽羅國)을 세웠다고 전한다. 양씨는 모두 제주 양씨(濟州梁氏)에서 분관되었는데,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오자 559년 진흥왕이 벼슬을 내리고 ‘양(良)’을 ‘양(梁)’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남원(南原)으로 분적(分籍)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씨는 제주와 남원으로 분관되었고, 후에 충주(忠州)로도 분관되어 삼적(三籍)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전하는 문헌이 없어 선계(先系)는 알 수 없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四岩) 마을남원 양씨뿐만 아니라 밀양 박씨(密陽朴氏),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척하여 마을을 이룬 곳으로 전한다.

[명칭 유래]

남원 양씨강서구에 정착하여 세거를 이루었던 사암 마을은 화전리 남쪽 해안에 네 개의 큰 바위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암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게 쫓기던 왜적이 접전 끝에 상륙하려다가 큰 바위에 놀라 당황하여 조선 수군에 쫓겨 간 후 다음에 찾아와서 ‘네가 바위구나’라고 한 데서 여암(汝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선바위, 탕건 바위, 입 바위, 등잔 바위 등 네 바위를 가리킨다.

[형성 및 변천]

남원 양씨의 시조인 양능양(梁能襄)이 고려 성종 때 중봉대부(中奉大夫), 병부 낭중(兵部郎中), 동궁 내시[東宮內侍], 강학사(講學士)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남원 양씨 병부공파가 강서구 지역에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0년대 초에 중봉대부 남원군 양능양의 20세손 양세경(梁世景)이 남원을 떠나 김해(金海)로 이거하면서부터이다. 양세경의 묘지가 녹산(菉山) 태야(台也) 산기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양세경의 아들 양계남(梁繼南)의 묘지가 사하구 승악산에 있음을 보아 녹산 태야 지역에 정착한 뒤 부산의 여러 지역으로 이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하구 녹산동 사암 마을에는 1770년경 양계남의 증손자 24세 양복해(梁福海)가 들어오면서 240여 년간 세거하여 왔다. 이 지역의 근대 인물로는 3·1 운동 때 명지면(鳴旨面) 의거(義擧)를 이끈 양왕석(梁旺錫)과 가덕진(加德鎭) 의거를 이끈 유지 양흥석(梁興錫), 김해사립녹명학교(金海私立鹿鳴學校) 개교의 주역으로 동참한 양은석(梁銀錫)이 있다.

[자연 환경]

사암 마을사하구 녹산동 끝 바닷가 모래톱 위에 형성된 마을이었다. 낙동강 끝자락으로 어자원이 풍부하고 토질이 좋아 농사와 어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처음 들어와서도 개척하기가 쉬운 조건이었다.

[현황]

녹산동 사암 마을 남원 양씨 세거지는 240여 년간 이어 왔으나, 2007년부터 화전 산업 단지 조성으로 철거된 뒤 다 흩어지고 지금은 세거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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