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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동 구랑 마을 동래 정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406
한자 菉山洞九郞-東萊鄭氏世居地
영어의미역 Noksan-dong Dongrae Jeong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구랑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녹산동 구랑 마을 동래 정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구랑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었던 동래 정씨 세거지.

[개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신라의 6부 촌장 가운데 자산진부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시조는 신라 때 안일 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나 문헌 기록이 없어 고려 때 보윤 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고 그 후 안일 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중시조로 한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정착한 동래 정씨는 동평군파(東平君派)이다.

동평군파의 파조(派祖)는 동평군 정종(鄭種)이다. 정종은 조선 초의 무신으로 단종 대에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진압하여 군공 1등, 이후 세조의 즉위를 도와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충청도 도절제사를 거쳐 경주 부윤이 되었다.

[명칭 유래]

구랑(九郞) 마을김해군 녹산면의 소재지였던 마을로, 천마산(天馬山) 아홉 봉우리인 구절봉(九折峰)이 변하여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과 신라 시대 낭관(郎官) 아홉 사람이 와서 살았다는 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형성 및 변천]

녹산동 구랑 마을 동래 정씨 세거지는 1630년경에 통덕랑(通德郞) 정국(鄭國)이 입향조로 정착하였다. 정국의 아들 정이창(鄭以昌)이 1653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영 충의위(五衛營忠義衛)가 되었으며, 이후 많은 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정세화(鄭世和)[1658~1736],오위영 충의위 정취강(鄭就綱)[1674~?],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정팽수(鄭彭壽)[1698~1748] 등이 있다.

또한 교육가 정진효(鄭鎭孝)[1918~1981]도 강서구 녹산동 구랑 마을 출신이다. 구랑 마을에 살던 동래 정씨는 이웃 마을인 미음 마을세산 마을로 일부 이거하였다. 구랑 마을 뒷산에 선조 정이창, 정세화, 정취강, 정팽수, 정진효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자연 환경]

강서구 녹산동 구랑 마을봉화산(烽火山)과 천마산을 배경으로 보개산(寶蓋山)을 안산(案山)으로 하는 분지형 마을로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졌다. 부산광역시로 편입되기 전 오랫동안 김해군 녹산면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녹산초등학교가 1927년 개교하여 80년간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현황]

1630년경 동래 정씨가 정착하기 전 강서구 녹산동 구랑 마을에는 성화례산 봉수대를 관리하던 감고(監考)와 봉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창 동래 정씨가 번성할 시기에는 구랑 마을에만 3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여여정(與與亭)이라는 재실도 있었다. 2002년까지만 해도 구랑 마을에 15가구, 세산 마을에 9가구, 미음 마을에 5가구가 살았으나 구랑 마을미음 마을이 미음 산업 단지 조성으로 철거되면서 흩어진 뒤 2013년 현재 세산 마을에만 8가구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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