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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동 남원 양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97
한자 老圃洞南原梁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Namwon Yang Clan in Nopo-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대룡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0가구
세거지 노포동 남원 양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대룡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있는 남원 양씨 세거지.

[개설]

양씨(梁氏)는 모두 탐라국[현 제주특별자치도] 삼성혈 설화의 양을라(良乙那)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 혈족이다. 양을라는 태고에 제주도 한라산 북록 모흥혈(毛興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탁라국(乇羅國)을 개국하여 양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374년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가자 내물왕이 성주 왕자(星主王子)의 작호를 내리고 의관을 하사하여 신라의 조복을 갖추어 입게 함으로서 이때부터 ‘양(良)’을 ‘양(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682년(신문왕 2) 양순(梁洵)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한라군에 봉해지자 그 후손이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왕실에 공이 많아 남원부백에 봉해지면서 제주에서 분적하여 남원(南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문헌의 실전으로 선계를 상고할 수 없어 양능양(梁能讓)[병부공파], 양수정(梁水精)[대방군공파], 양주운(梁朱雲)[용성공파], 양윤위(梁潤渭)[장영공파]를 1세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이어 왔다. 노포동 남원 양씨는 병부공파에 속한다.

남원 양씨의 본거지인 남원에는 파조 양능양 이하 9대 선조의 단(壇)과 10세 묵재공 양우(梁祐)의 묘가 있다. 양우의 손자 양구주(梁九疇)가 남원군에 봉하여졌다. 양구주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문양공(文襄公)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가 문양공파의 파조이다. 양성지는 조선 시대 김포현에 거주하였고,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시작으로 성종 조까지 6조(朝)를 섬기면서 순성명량(純誠明亮) 좌리공신 숭정대부 행이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서운관 판사, 훈련원사, 춘추관사,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남원군에 봉하여졌다. 이외에 주요 관직으로 공조 판서 2회, 사헌부 대사헌 2회,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정선공 양수(梁琇)이며, 양수의 손자가 평창공 양희증(梁希曾)이다.

양희증의 아들 청풍헌 양사원(梁思源)은 일찍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여 한성에서 밀양으로 와 우거하였으나, 가화(家禍)로 인하여 아들 양겸(梁謙)이 동래 부곡으로 들어와 세거를 이루었다. 양겸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양조한(梁潮漢)이고, 둘째 아들이 양근한(梁近漢)이며, 막내아들이 양통한(梁通漢)이다. 양근한은 금정구 두구동, 양통한해운대구 반송동으로 이거하였다. 양통한양지, 양조한과 함께 부산 삼절사에 봉사되었다.

[명칭 유래]

노포동 대룡 마을계명봉으로부터 마을 뒷산에 큰 용이 내려와 앉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대룡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양조한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동래성을 침범하자 동래 향교 대성당 문묘에 종향 종사하는 여러 위판을 땅에 묻고 오직 오성의 위판만은 동래성 내 객사인 정원루에 옮겨 봉안한 후 이를 지키다 순절하였다. 양조한의 아들 양홍(梁鴻) 또한 난병(亂兵)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노포동 남원 양씨 입향조인 양조한의 손자 양부하(梁敷河)는 어린 나이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1610년(광해군 2) 7월, 19년 만에 조선인 82명을 데리고 선박을 타고 부산 감만 포구로 환국하였다. 그때 나이는 31세로, 소거지향(所居之鄕)인 동래 부곡으로 왔다.

양부하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종택(李鐘澤)의 여식을 취하여 아들 양응빈(梁應濱)·양우빈(梁遇濱)과 3녀를 두었다. 손(孫)으로 양익철(梁益哲), 양익균(梁益均), 양진건(梁振乾)을 두었다. 양부하는 17세기 중반에 입향하여 노포동 대룡 마을에서 거주하다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손들은 대룡리에서 대대로 살았으며, 그 뒤로 동래 무청 장관청 등에 출입하였다.

[자연 환경]

노포동 대룡 마을은 계명봉 기슭에 웃각단[웃마을]과 국도 제7호선 아래쪽에 아래 각단[아래 마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의 계명산이 마을 뒷산이며 북동쪽으로 사배야산이 있다.

[현황]

금정구 체육공원로 399번길 197의 문중 선산 1만 3223.14㎡[4,000여 평]에 양부하의 묘소를 비롯한 ‘남원 양씨 문양공파 대룡 문중 진성단(南原梁氏文襄公派大龍門中盡誠壇)’이 있다. 진성단에는 부하공(敷河公)을 포함하여 232위가 모셔져 있고,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올린다. 2013년 현재 남원 양씨는 16대째, 10가구가 살며, 인근 지역에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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