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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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回東洞金海金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Gimhae Gim Clan in Hoedong-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회동동 동대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회동동에 있는 김해 김씨 세거지.
[개설]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가락계 김씨의 종통으로 가락국의 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한다. 가락국이 멸망하고 11세손 김무력(金武力)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에 이르고, 그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혼인하여 김유신(金庾信)을 낳았다. 김해김씨의 파계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142파로 분파되는데, 이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 종파로는 고려조의 김목경(金牧卿)을 증조로 하는 금령군파(金寧君派), 김목경의 아우인 김익경(金益卿)을 증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증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이다.
금령군파는 그 후손이 서울에서 살았다고 하여 경파(京派)라고도 하며, 감무공파는 그 후손 가운데 김극조(金克祧)·김완(金完)·김여수(金汝水)·김세기(金世器)가 봉군(封君)되었다 하여 사군파(四君派)라 하며, 판도판서공파는 김극일(金克一)·김일손(金馹孫)·김대유(金大有) 등 세 명현이 나왔다 하여 삼현파(三賢派)라고도 부른다.
[명칭 유래]
회동동 동대 마을은 금정구 금사동 15통 일대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동대(東臺)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동대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판도판서공파 절효공 김극일(金克一)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김건(金健)·김맹(金孟)·김용(金勇)·김순(金順)·김늑(金勒)·김현(金鉉)이다. 둘째 아들 참판공 김맹의 아들 가운데 큰아들이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이고, 둘째 아들이 매헌공 김기손(金驥孫)이며, 셋째 아들이 탁영공 김일손(金馹孫)이다. 김준손의 아들 삼족당 김대유의 5세손 김석명(金碩鳴)이 회동동 김해김씨 동대 마을 입향조이다.
김대유의 자는 천우, 호는 삼족당으로, 현감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숙부 김일손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풀려 나왔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전목서직장을 지내다가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호조 좌랑·칠원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罷榜)되자 사임하고 청도의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청도의 자계 서원·선암사(仙巖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김석명은 17세기 초반 청도에서 지금의 회동동 회천 마을인 당시 동래 회천(回川) 맞은편 수영강 상류 붕덤산 아래에 복택(卜宅)하여 살았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지금의 동대 마을로 옮겨 왔고, 그 후손 15대가 약 400년간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다. 입향조인 김석명 후손 일파가 동래 고을에 출입하고, 통정대부 김성철(金成喆), 가선대부 김호준(金昊俊) 등이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자연 환경]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부의 동쪽 10리 지점 사천(絲川) 강변에 높이가 4~5장 되는 바위가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골짜기 물이 활 모양으로 휘돌아 안고 흘러 수십 척의 맑고 깊은 못을 이루어 그곳에는 고기들이 많아 가히 낚시를 할 만하다. 봄여름에 대 위에 올라 보면, 마음이 상쾌하고 탁 트여 풍치가 있고 시를 지을 만하다.”고 하였다.
[현황]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 따르면, 동대동[현 금정구 회동동 동대 마을]의 호수는 8호로 김씨가 5호, 정씨가 3호로 나와 있다. 후손들은 성지재(聖旨齋)를 건립하고 여기에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978년 도시 고속 도로 개설로 인하여 성지재를 북쪽으로 약간 올려 이건하였는데, 지금은 김해김씨 삼현파 회동 문중 사무소를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2013년 현재 김해김씨는 15대째, 3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