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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동 개성 왕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40
한자 龍湖洞開城王氏世居地
영어의미역 Yongho-dong Gaeseong Wang Clan Hometow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영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20가구
세거지 용호동 개성 왕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개성 왕씨 세거지.

[명칭 유래]

용호동은 조선 시대에 분개라고 불렀던 곳이다. 분개가 용호동으로 바뀐 것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이곳 염전을 수탈하고 통감부에서 이곳에 ‘시험 제염 용호 출장소(試驗製鹽龍湖出張所)’를 설치한 때를 전후한 시기로, 인근 용당동 이름을 참고하여 큰 염전의 호수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형성 및 변천]

1664년(현종 5) 왕대봉이 경상북도 상주에서 동래 안락동으로 이주하였다. 왕대봉의 증손자인 왕태룡(王泰龍)[1724∼1802]이 파평 윤씨 윤천백(尹天伯)의 사위가 되어 1739년(영조 15) 반송에서 용당으로 이주하였으며, 생선 중개업을 하였다. 그는 1780년경 윤씨들이 세거하던 처향인 용호동에 정착하였다. 그 후 왕태룡의 아들 왕문욱(王文郁)[1748∼1810], 손자 왕지택(王之澤)[1771∼?]이 용호동에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1937년 간행된 『동래군지(東萊郡誌)』에 왕대봉(王大封), 왕만줄(王萬茁), 왕채권(王采權), 왕영석(王英錫), 왕기통(王基統), 왕장식(王章植), 왕기형(王基馨), 왕성식(王聖植)[원리 거주], 왕봉수(王奉守)[장전(長箭) 거주] 등 개성 왕씨(開城王氏)용호동에 거주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후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왕기하(王基厦)[1853년생, 자 필오(弼五)]의 비석이 선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자손들로 동래 향교(東萊鄕校) 유계원(儒契員)으로 기록된 왕기하(王基厦), 왕기영(王基永)[1883년생, 자 세명(世明)] 등이 있다.

[자연 환경]

용호동의 산세는 동쪽으로 장산봉이 방파제 구실을 하고, 서쪽으로 비룡산이 담장처럼 용호동을 감싸 주며, 북쪽 해안은 천연의 분개 포구를 만들어 장구한 세월 동안 천일제염의 생산지였다. 남쪽은 백운포가 남해 바다와 접하며 용마산 줄기가 ㄴ자 모양으로 방파제 구실을 하여 해풍을 막아 준다.

[현황]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는 용호동개성 왕씨 11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와 있다. 1936년에 발행된 『조선의 성(姓)』에는 30가구, 1971년 부산의 동족 마을을 조사한 보고서에는 25가구, 1976년에는 25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2013년 현재 개성 왕씨 문중은 용호동에 120가구, 부산 지역 전역에는 250가구가량 거주한다. 후손들은 용호동에 문중 회관인 용호 문중 회관을 건립하여 건물 4층에 선조 9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제향을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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