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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포동 김녕 김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34
한자 田浦洞金寧金氏世居地
영어의미역 Jeonpo-Dong Gimnyung Gim Family Line Villagy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전포동 김녕 김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있었던 김녕 김씨 세거지.

[개설]

김녕 김씨(金寧金氏)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다.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仁宗)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하여졌으며,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이에 그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다가 고려 후기 김녕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로왕(金首露王)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 김녕으로 본관을 확정하였다.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이 고려 시대에 안렴사를 거쳐 형부 시랑을 지내고 이부 상서에 증직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 판서의 벼슬을 내리며 회유하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김광저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청북도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다. 분성군(盆城君) 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등극 전의 정의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하고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아산 도고산에 은둔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庵)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관(金觀)의 아들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1399년(정종 1) 2월 16일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이조 판서로 내외 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세조 2) 6월 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거창 현감과 양지 현감을 거쳐 영월 군수를 역임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 ‘5세 충효(五世忠孝)’의 정문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 지리와 실학에 능통한 인물로 단종이 죽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서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 부사 김언공(金彦恭)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를 등에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 아들 김기남(金起南), 김난생(金蘭生) 형제는 병자호란에 순절하여 김준걸(金俊傑)[선조 때 공신], 김득성(金得誠), 김영길(金永吉)[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김진행(金鎭行)은 효행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과 효의 전통을 이었다.

[명칭 유래]

전포동은 예전에 산자락에 마을과 논밭이 있었는데, 위치가 갯가이기 때문에 밭개라고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전포리(田浦里)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김충립(金忠立)과 김충주(金忠柱)가 할아버지 김문기의 사육신 사건으로 벌을 받아 관노(官奴)가 되었는데, 동생 김충주는 탈출하여 안산에 숨어 살게 되었고 형 김충립은 관노 생활을 계속하다가 아들 ‘김충지(金衷之)’를 낳았다. 김충지는 아들 김영시(金永時)를 두었는데, 김영시의 큰아들 김제학(金提鶴)의 아들인 김춘(金春)이 동래로 내려왔다.

김춘의 큰아들 김이람(金以藍)의 후손은 현재의 중구 보수동 쪽에 정착하였고 작은 아들 김하빈(金夏彬)은 현 동래구 사직동에 정착하였다. 김영시의 둘째 아들 김논실(金論實)은 현 동래구 명륜동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일부가 살고 있고, 셋째 김효건(金孝建)의 아들 김춘택(金春澤)에 이르러 지금의 금정구 장전동에 정착하였다. 그 뒤 자손들이 사직동여고리, 명장리, 장전리, 전포리 등으로 흩어져 살았는데 1900년경 전포리에 정착한 김기운은 족보에서 완전 누락되어 김춘택의 몇 세손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자연 환경]

전포동의 동쪽은 황령산(荒嶺山)[423m]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하여 있다. 산지의 서쪽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전포천 상류를 이루며, 남서쪽으로 흘러 동천에 합류한다. 조선 시대에는 황령산 아래 동천 하구까지 배가 정박하였으나 현재는 매립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소하천도 대부분 복개되어 있다.

[현황]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는 전포리 총 33가구 중 단 3가구가 김씨이나 이 중에서 2가구가 김녕 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4년 간행된 『조선의 성(姓)』에서는 이마저 사라지고 없어 2013년 현재 전포동김녕 김씨 세거 형태는 알 길이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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