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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동 달성 서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31
한자 伽倻洞達城徐氏世居地
영어의미역 Gaya-Dong Dalsung Seo Familly-Line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70여 가구
세거지 가야동 달성 서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에 있는 달성 서씨 세거지.

[개설]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영남의 거족으로서 고려 멸망 후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크게 나누어졌다. 경파는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며, 조선조 벼슬에 나아가 중앙 조정에 출사한 계통을 말하며, 뒤에 흔히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부르게 되었다. 향파는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며, 절의를 지켜 출사(出仕)하지 않고 영남 일원에서 세거한 계통이다.

분파는 크게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석령(錫苓)진사공파,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개 파로 대별되는 바, 이 중 부산진구 가야동에 세거하는 달성 서씨는 현감공파로, 파조는 하양 현감을 지낸 서제(徐濟)이다.

[명칭 유래]

가야동은 원래 동래부 동평면(東坪面)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가야’라는 이름은 옛날 6가야(六伽倻)에서 따 왔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현 동구 수정동과의 사이에 감고개라는 산 고개가 있는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감고개의 아랫마을이란 뜻이 변천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형성 및 변천]

파조인 서제 이후 충순위(忠順衛) 서맹원(徐孟元), 예빈시 직장 서필(徐弼), 서응기(徐應期), 직장 서호(徐灝)로 이어 오던 중 조선 명종(明宗) 때 홍산 군관으로 재직하던 서사수(徐思遂)가 직무에 관련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동래로 귀양 오면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가야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입향조 서사수의 외아들 서선부(徐善富)는 사복시 정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갑자기 집 안으로 들이닥쳐 집안 문적(文籍)이 모두 타는 중에 한 조각을 근근이 지켜 이를 근거로 가첩을 써 내려와 가문의 근거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동래 쪽에 흩어져 살다가 양산, 선동, 만덕, 가야 등으로 이거하면서 자연스럽게 각 동별로 세거지가 만들어졌다.

[자연 환경]

가야동 남쪽은 엄광산[504m]과 수정산[306m]이 있는 산지이며, 이 산지의 북쪽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당감천과 가야천으로 흘러든다. 과거에는 하천 주변에 넓은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나 현재는 도시화로 대부분 주택지가 되었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姓)』에 가야동달성 서씨는 16대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임진왜란 전후 이주하여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9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따르면 모두 26가구가 살았는데, 그중 달성 서씨가 10가구였다. 그 후 『조선의 성』에는 22가구가 산다고 되어 있으니 30년간 12가구가 늘어난 것이다. 2013년 현재 달성 서씨 약 70여 가구가 사는데 특별한 인물은 배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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