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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읍동 밀양 손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27
한자 草邑洞密陽孫氏世居地
영어의미역 Choup-Dong Milyang Son Family Line Villagy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00여 가구
세거지 초읍동 밀양 손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밀양 손씨 세거지.

[개설]

밀양 손씨(密陽孫氏)가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진 7세 손긍훈(孫兢訓)에 이르러서이다. 손긍훈은 태조(太祖) 19년(936) 후백제의 신검군(神劍軍)을 대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왕식렴(王式廉) 등과 함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장수로 출전하여 개국 공신의 반열에 올라 무열(武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15세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 손변(孫抃)[초명 손습경(孫襲卿)],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올라 밀성군(密城君)에 봉하여진 19세 손빈(孫贇)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하나의 계파로 이어져 오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파가 나누어졌다.

먼저 손빈의 큰아들 손광(孫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계파가 있다. 손자인 손탁(孫晫)의 후손인 좌사부공파(左師傅公派), 손하(孫賀)의 후손인 전농시사공파(典農寺事公派), 손타(孫酡)의 후손인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로 구분되고, 군사공(郡事公) 손영(孫榮)의 후손은 자손이 번성해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손영(孫榮)의 4세손인 손책(孫策)의 후손이 목사공파(牧使公派), 손급(孫笈)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 손지(孫智)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손수령(孫壽齡)의 후손이 오곡공파(梧谷公派), 손이(孫貽)의 후손이 형조판서공파(刑曹判書公派), 손수성(孫壽星)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손숙재(孫淑才)의 후손이 국자진사공파(國子進士公派), 평리공의 손자 손기(孫琦)의 후손이 정승공파(政丞公派)로 분파되었다. 손빈의 둘째 아들로 송라 찰방을 지낸 진사공(進士公) 손원(孫沅)의 후손은 그 5세손에 이르러 손부산(孫富山)·손용유(孫龍游)의 두 손자에게 후손이 이어졌는데, 손부산의 후손이 따로 분파되어 기로공파(耆老公派)를 이루었다.

밀양 손씨 세거지를 살펴보면, 19세 손빈의 현손인 23세 손용도(孫俑道)의 자손들은 관향인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위양리 일대에 살았고, 28세 손충보(孫忠輔)로부터 29세 손창조(孫昌祖)의 후계는 임진왜란 당시 창녕의 영산과 지금의 고령군 다산에 나뉘어 살았다. 34세 손광후(孫光垕)와 손광열(孫光悅) 형제의 후계는 임진왜란 후 5세를 지나고 밀양으로 다시 회향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밀양 손씨 대종손인 43세 손관규(孫官圭)까지 후계가 이어지며, 주로 밀양 부북면 덕곡리를 집성촌으로 윗대의 시조와 중시조의 유적들을 보존하며 살고 있다.

손용도(孫俑道)의 6세손인 29세 손복기(孫復起)의 후계는 경상남도 김해의 주촌(酒村)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25세 손계선(孫繼先)이 거제에 들어가 살았으며, 다시 그의 현손인 손희준(孫希俊)이 임진왜란을 피해 거제로 가 자리 잡은 이래 그곳에도 자손들이 세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손용도(孫俑道)의 동생인 23세 손시도(孫偲道)의 자손들은 28세 손세평(孫世平) 이래 일부가 충청북도 충주로 옮겨 갔던 것 같고, 30세 손범(孫凡)의 자손은 울산, 27세 손구(孫龜)의 자손은 동래를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 같다.

30세 손인갑(孫仁甲)의 자손이 경상남도 의령 땅에서 살다가 후에 일부가 김해로 옮겨 갔고, 29세 손연수(孫淵壽) 이래로 여러 대의 묘영(墓塋)이 사천군에 소재하므로 그곳에 밀양 손씨 자손들이 세거하였으며, 27세 손형로(孫亨老) 이래로 충청북도 괴산에, 30세 손화숙(孫和叔) 이래로 공주에, 손윤생(孫潤生) 이래로 당진에 자리 잡은 후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와서는 특히 밀양군 밀양읍 교동에 많은 자손이 모여살고 있다.

[명칭 유래]

초읍동은 과거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의미로 새터라 불렸다. 이는 동평현의 치소가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 피폐하자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새터로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 ‘새’를 갈대를 의미하는 ‘초(草)’로 읽고, 터는 ‘읍(邑)’으로 표기하여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형성 및 변천]

부산에 밀양 손씨가 들어온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밀양 손씨 족보에 따르면 밀성군의 후손으로 손광(孫洸), 손하(孫賀), 손복경(孫卜經), 손유호(孫攸好), 손목종(孫睦宗), 손덕번(孫德蕃)까지는 밀양에서 세거하다가 손덕번의 아들 손석산(孫碩山)이 동래로 들어와 화지산 아래 살았다고 한다. 손석산이 초읍동 밀양 손씨 입향조로, 그때가 조선 성종(成宗) 때인 1480년경이다. 그 이후 손석산의 아들 손수경(孫守敬), 손걸(孫傑), 손백연(孫百連), 손영수(孫英秀), 손이룡(孫以龍), 손인례(孫仁禮), 손만귀(孫萬貴), 손순도(孫順度)[일명 손순우(孫順遇)]로 이어진다.

한편 일설에는 약 500년 전 23세 손시도의 후손인 손구(孫龜)가 초읍에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고 하나, 손구는 위 입향조 ‘손석산’보다 1세대 후이고 연대도 30년 정도 뒤이기 때문에 동래와 초읍의 입향조는 ‘손석산’이 맞다고 본다. 손순도는 동래 출신이면서도 함경도 은성진 관미 전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내다가 치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경험을 살려 동래성을 쌓는 데 공을 세웠다.

[자연 환경]

초읍동 북쪽에 자리한 백양산[642m]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지가 동쪽으로 화지산, 서쪽으로 언덕산으로 이어지면서 에워싸고 있는 분지 지형이다.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성지곡을 지나 부전천으로 유입한다.

[현황]

1904년에 발간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따르면 초읍리[현 부산진구 초읍동]에는 모두 41가구가 살았는데, 그중 밀양 손씨가 10여 가구이다. 30년 후인 1934년에 간행된 『조선의 성(姓)』은 35가구로 기록되어 있다. 2013년 현재 밀양 손씨 약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광복 이후에 전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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