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홍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6953
한자 李洪昱
영어음역 Yi Honguk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예술인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경력 장관청 파총|통신사 주사
출생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동래속영회 입회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동래기영회 입회

[정의]

개항기 동래부에서 활동한 무임.

[활동 사항]

이홍욱(李洪昱)은 본관이 연안(延安)이며, 자는 영칠(英七)이다. 1876년에 태어났으며, 조선 말 동래부의 무청(武廳)인 장관청(將官廳)의 파총(把摠)과 초관(哨官), 작대청(作隊廳)의 백총(百摠)을 역임한 무임(武任)이다. 1902년에는 통신사(通信司) 전화과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이후 경력에는 전(前) 주사라는 명칭이 많이 나타난다.

아버지 이우경(李雨慶)은 장관청의 천총(千摠)을 비롯하여 작대청·별군관청(別軍官廳)·별기위청(別騎衛廳) 등에서 무임직(武任職), 형방 및 서계색(書契色) 등의 이서직(吏胥職)을 역임하고 서생진 첨사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동래감리서 주사를 역임한 바 있는 이광욱(李光昱)은 사촌 형이다.

이홍욱의 집안은 증조 할아버지 이래 동래부의 무임직이나 이서직을 역임하였고, 지역의 이서층과 무임층이 관직에서 물러나 조직한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 무임직과 이서직의 자제들로 구성된 동래속영회(東萊續英會)에 입회하여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홍욱 역시 1916년 동래속영회, 60세가 되는 1936년에 동래기영회에 입회하였고, 1934년경에는 동래속영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동래속영회 회장을 역임할 때 일제 강점기 민속학자였던 송석하(宋錫夏)를 만났다. 송석하「동래 야류」를 조사할 때 이와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지역 무임직이나 이서직의 후예들이 「동래 야류」를 연희(演戱)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홍욱은 1936년 동래기영회에 입회한 후에 숭의계(崇義契)에 참여하여 동래기영회 회원들과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제의(祭儀)에 참석하였다.

동래기영회의 대표적 활동이 육영 사업인 만큼 이홍욱이광욱과 함께 동래의 동명학교(東明學校) 건립을 주도하였고, 지역 유지들과 동래부 수면의 사립 학교 정정의숙(貞靜義塾)에 기부금을 내었다. 이홍욱과 그의 집안은 동래부의 무임직, 이서직 후예들이 조선 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변화 속에서 지역 사회를 어떻게 주도해 나갔고, 교육·문화·경제 분야에서 어떠한 일을 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격으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