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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5717
한자 開成學校
영어의미역 Gaeseong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226번길 15[영주동 582-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교
설립자 박기종 외 4명
설립 시기/일시 1896년 3월 1일연표보기 - 사립 부산개성학교로 설립
개칭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사립 부산개성학교에서 공립 부산개성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공립 부산개성학교에서 사립 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칭
최초 설립지 개성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582-2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있었던 부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

[설립 목적]

개성학교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학제가 공포되었지만 여전히 서당에 의지하는 열악한 교육 환경에 처해 있었던 구한말의 상황에서 ‘한국 국민의 지능을 계발하고 도덕을 진전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 설립

1895년 부산 경무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박기종(朴琪淙)이 부산에 근대식 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이내옥(李乃玉), 배문화(裵文華), 변한경(邊翰敬), 이명서(李命瑞) 등과 협의하여 사립부산개성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600원씩 출자한 자금 3,000원으로 영주동의 현 봉래초등학교 남쪽 언덕 위에 3,300㎡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건물 6동을 건축하고 1896년 2월 14일에 학부의 내락을 얻어 3월 1일에 개교하였다.

학교는 초등 과정과 중등 과정을 겸한 학교로 개교 당시 100여 명이 입학하였으며, 일본인 아라나미 헤이치로[荒波平治郞]가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아라나미 교장은 박기종과 협의하여 여러 분야에서 학교 설립에 조력하였다. 교직원은 교장 외에 이승규(李承珪)가 한문 및 한국어를 담당하였고, 일본인 1명이 일본어를 담당하였으며, 얼마 뒤에 일본인 체육 교사가 촉탁 교사로 추가되었다. 그러나 학교 운영 경비 부족으로 한국인 교사와 일본인 교사가 보수 유무에 관계없이 근무하여 근근이 1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당국은 타개책 마련을 위해 여러 차례 학부에 청원하고 호소하였다. 그 결과 1897년 정부로부터 공립 학교로 인가되어 공립부산개성학교로 전환되었고 정부에서 1,500원, 일본 외무성에서 1,800원을 지원받게 되어 학교의 기초가 잡혀지게 되었다. 1898년에는 초등과 전기의 제1회 졸업생 6명이 졸업하였다. 이와 함께 부산 지방 주민들의 교육열이 고조되어 여러 곳에서 지교 설치를 요망하였고, 1899년 개성학교는 구관지교와 부산진지교를 설립하여 교사를 파견하고 경비를 보조하였다.

2. 지교와 보조교

공립부산개성학교 구관지교는 지금의 구관(舊館 혹은 고관(古館)[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있었던 구관서당을 개편하여 설립한 것으로, 한문 교사 1명과 일본어를 가르치는 상급생을 파견하였고 일본인 교사를 수시로 보내어 감독하였다. 그러나 1908년 정부의 보조가 중단된 개성학교는 구관지교와의 관계를 끊었다. 부산진지교는 좌천동에 있던 한문숙 육영재(漢文塾 育英齋)를 개편하여 설립하였다. 1908년 구관지교와 함께 지교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였으나 부산진지교에서 계속 지교로 존속할 것을 요망하여 지교로 하다가 1909년 공립부산개성학교 부산진지교가 사립부산진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어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1900년에 밀양의 손정현이 설립한 사설 학교를 보조교로 하여 밀양개창학교(密陽開昌學校)라고 하였으며, 교사 1명을 출장 근무시키고 760원을 보조하였다. 이 보조교는 한때 초등과에 간이 중등과를 설치한 일이 있었으며, 학생 수는 30~40명 정도였다. 설립자인 손정현의 노력으로 공립 인정을 받았으나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전혀 받지 못하여 개성학교의 보조금과 손정현의 출자금으로 유지하다가 1908년 공립 밀양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모든 것을 인계하여 보조교의 관계가 끊어졌다.

1900년에 마산의 일본영사관 경찰서 내의 한 가옥을 빌어 설립된 마산포개진학교(馬山浦開進學校)도 보조교로 하여 경비를 보조하고 교사를 파견했으며 학생 수는 초등과 50명 정도였다. 1902년에 수공과와 농사 시험장을 설치한 것이 특이했으며 1907년 마산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자 학생을 인계하고 1908년에 폐교하였다.

1904년 경주계림학교와 대구달성학교도 보조교로 하여 각각 보조금과 교사를 파견하다가 1908년에 관계가 끊어졌다. 지교와 보조교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보통학교령」의 공포로 각지의 지교와 보조교가 보통학교로 전환하게 되었고, 개성학교가 정부에 헌납될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당시 지교는 2개[구관지교와 부산진지교]가 있었고, 초등과 전기 3학년까지 있었다. 보조교는 6개가 있었고, 초등과 전기와 후기 1, 2학년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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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정부가 교육 관계 법령을 정비하고 체제가 갖추어진 학교의 설립을 촉진하면서 사립 학교를 관·공립 학교로 이관하는 작업을 추진하였고, 1907년 개성학교도 관립 이관 통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개성학교는 이에 반대하며 사립 보조교로 해줄 것을 청원하여 같은 해 3월에 사립 부산개성일어학교로 고치고 종전대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 정부의 보조금 단절 통첩으로 경영 유지가 어렵게 되어 학부에 학교를 헌납하기로 하고, 1909년 3월에 학교를 동래 부윤 김창한(金彰漢)에게 인계하였다. 이어 4월 9일에 학부는 교직원과 학생의 대부분을 인수하여 개성학교 자리에 공립 부산실업학교와 공립 부산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개성고등학교와 부산초등학교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 교과 과정과 학생

교과 과정은 초등과·중등과·고등과 3과를 병치 하였다. 초등과는 전기(前期)·후기(後期)로 나누고 각각의 수업 연한은 3개년이었다. 전기는 일본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6년제] 정도였고, 후기는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8년제] 정도였으며, 전·후기를 합쳐 전과(全科)라고 했다. 중등과는 수학 연한이 4년이었고, 일본의 심상중학교와 실업학교 정도였으며, 고등과는 수업 연한이 2년이었고 일본의 고등중학교 정도였다. 별도로 연구과(硏究科)를 두었으나 입학자가 없어 시행되지 않았고, 고등과도 명목상 존재했으며, 중등과의 입학자는 소수였다.

재학생 수는 입퇴학이 빈번하여 그 수를 알기가 어려우나 1906년의 보고서에 “창립 이래 60~70명 사이를 오르내리며 10년간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60~70명 정도 재학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03년부터 취학 학생이 150명 정도 급증하였으므로 1907년에 교실 2개를 증축하였고, 정원도 200명으로 변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중도 퇴학자가 많았던 것은 신교육을 받은 인재가 많이 필요할 때여서 졸업을 기다리지 않고 취직, 또는 유학을 한 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칙에 학생 연령이 8세부터 25세까지로 되어 있으나 평균 연령은 16~17세였고, 30세에 가까운 학생도 있었다. 대부분 부산 거주자였으나 학교 명성이 높아지자 진주, 대구, 하동, 성주, 그리고 전라도에서 유학을 온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매년 수학여행도 실시하여 국내는 마산, 밀양, 대구, 경주, 울산, 동래, 김해 등지를 1~2박으로 여행하게 했고 규슈나 오사카, 교토 등지로의 일본 여행도 3회 실시하였다. 학업과 행동이 우수한 자는 일본에 유학시켰으며 10여 명 정도였다. 1901년에는 동창회를 조직했으며, 동창회에서는 『개성 신지(開成新誌)』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2. 교과서와 학칙

교과서는 문교성의 인가를 받은 것과 한국 학부에서 편찬한 것 외에 한문 등이었고 교수는 대개 일본어를 사용하였다. 교직원은 교장과 교사, 조교사(助敎師), 간사, 서무 회계가 있었다. 교사는 3명 내지 5명이었고, 지교와 합치면 한국인 10명, 일본인 7~8명 정도였다. 조교사는 수업생(授業生)이라고도 했으며, 졸업생 또는 일본인을 임용하여 교사의 직무를 보조하도록 하였다. 또 간사는 제반 교무를 처리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나 실제 임용한 사실은 없었다.

1903년 개성학교 학칙은 다음과 같다. 1. 본교는 한국민의 지식을 계발하고 도덕을 개진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주로 한다. 2. 본교는 학부의 보조를 받으며 그 소관에 속한다. 3조 생략. 4. 본교는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의 3과를 병설한다. 그 정도의 수업 연한 분급에 관한 세목은 아래와 같다. 초등과는 전기·후기로 나눈다. 전기는 수업 연한 3개년[일본 심상소학교에 준한다.], 교과목은 수신, 독서, 회화, 작문, 습자, 산술, 한문, 지리, 역사, 체조이다. 후기도 3개년[일본 고등소학교에 준한다.]으로, 교과목은 수신, 독서, 회화, 작문, 산술, 지리, 역사, 도화, 습자, 한문, 체조, 이과이다. 중등과의 수업 연한은 4개년[일본 심상중학교 정도]으로, 교과목은 윤리, 독서, 작문, 산술, 기하, 대수, 지리, 역사, 물리, 화학, 박물, 외국어, 문법, 도화, 한문, 체조이다. 고등과의 수업 연한은 2년[일본 고등중학교 정도]으로, 교과목은 경학, 사학, 문학, 정치, 법률, 경제, 철학대의이다. 연구과는 수업 연한 1년[고등학교 정도]이고 교과목은 고등 회화, 고등 독서, 작문, 문법, 번역, 교학이다.

5. 입학 희망자는 학년 초에 입학 원서와 보증서를 제출하여 본교의 허가를 받을 것. 단 학년 기간은 매년 4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까지로 한다. 6. 입학 지원자로서 이미 학식과 소양이 있는 자는 특히 편입 시험을 치러 수시로 적합한 학급에 편입을 허가할 수 있다. 7. 신입생이나 수시 편입자를 불문하고 입학 지원자는 다음 각 항의 자격을 구비하여야 한다. 1) 연령이 8세 이상 25세 이하일 것. 2) 품행 방정, 지망 확실할 것. 3) 신체 건전할 것. 8. 본교 생도로서 교칙을 지키지 않거나 학업 해태(懈兌), 기타 사고에 의하여 졸업의 가망이 없는 자라고 인정될 때는 퇴학을 명할 수 있다.

9. 본교 생도로서 학업 면려, 품행 방정, 성적 우량한 자에게는 특히 상장 또는 상품을 주고 우대생으로 할 수 있다. 10. 본교 생도로서 중등과를 졸업하여 그 성정이 우수한 자에게 특히 외국 유학을 명할 수 있다[초등과 전과 졸업도 같음]. 11. 학업의 성적은 매학기 및 학년의 학력 시험에 의하여 검정한다. 12. 전기(前期) 학력 시험에 의하여 각과 평점은 100점 만점으로 하고, 평균 60점 이상을 급제점으로 하고, 90점 이상을 우등으로 한다. 정규의 졸업 시험을 치른 자는 학부아문에서 졸업 증서를 수여한다. 13. 본교는 당분간 속수(速脩)[예물의 뜻임] 및 수업료를 징수하지 않는다. 14. 당교 생도 각자의 비용은 자변할 것.[이하 생략]

[의의와 평가]

부산에서 최초의 근대 학교로서 의미를 가지며, 부산 교육의 뿌리가 이 개성학교에서 형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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