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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불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4489
한자 重石弗事件
영어의미역 Scandal over Dollars Made by Selling off Tungsten abroad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석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부정부패 사건
관련인물/단체 이연재|백두진|함인섭|미진상회|재무부|농림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6월연표보기 -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52년 7월연표보기 - 관련 국회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발생|시작 장소 중석불 사건 - 부산광역시
종결 장소 중석불 사건 -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 지역이 임시 수도였던 1952년 6월 정부가 중석(重石)[텅스텐]을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로 부당 이익을 챙긴 사건.

[역사적 배경]

대통령 직선제를 놓고 국회와 대립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이 국회가 주장하는 내각 책임제를 저지하고 직선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중석불(重石弗)[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달러] 불하를 통해 100억 원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였다. 중석불은 기계류나 선박 등 산업 자재 수입에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과 1951년 흉년 때문에 식량 사정이 악화된 것을 빌미로 식량과 식량 증산을 위한 비료 도입이 필요하다고 하여 중석불 처분 요령을 변경, 도입할 수 있는 물자에 식량과 비료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정치 자금을 댄 특정 민간 업자들에게 공식 환율[1달러=6,000원]로 중석불을 넘겼다.

[경과]

1952년 6월 4일 당시 대표적 정상(政商)[정치가와 결탁한 상인]이었던 이연재(李年宰)의 미진상회(美進商會)에 15만 1000달러를 불하한 것을 신호탄으로 14개 민간 상사[남선무역, 미진상사, 영동기업, 신한산업, 보금행, 고려흥업 등]에 총 18건, 395만 5300달러가 불하되었다. 7월 5일 이후에는 일체의 중석불 불하를 하지 않는다는 각의(閣議)의 의결을 무시하고 8월 1일까지 추가로 88만 달러를 불하하였다. 이로서 불하된 중석불 총액은 483만 5300달러에 달했다.

정치 자금을 내고 달러를 불하받은 민간업자들은 달러당 2만 원을 웃돌던 암시장에 중석불을 풀어 환차익을 챙겼다. 수입한 소맥분과 비료도 80%를 자유 시장 가격으로 판매하여 폭리를 챙겼다. 당시 소맥분의 자유 시장 가격은 공정 가격 4만 5000원보다 훨씬 높은 12만 5000원, 한 포대에 2만 8800원인 비료는 12만 1800원이었다. 1952년 7월 부산세관이 농림부 산하 보세 창고에서 밀가루를 압수하고 미진상사, 신한산업, 영동기업 등 3개 무역 회사 장부를 압수하였다. 1952년 7월 18일 국회 특별조사위원회 12명의 조사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환차익 505억 원, 가격 조작 265억 원이라는 폭리 구조가 밝혀졌다.

[결과]

사건의 사후 처리로 수입 농산물 가격을 문제 삼아 농림부 장관 함인섭, 차관 원용석, 양정국장 등이 경질되었다. 사건을 주도한 재무부 장관 백두진, 차관 박희연, 이재국장 최도용, 이재과장 황호영 등을 비롯한 재무부는 처벌받지 않았다. 중석불을 불하받은 민간 업자는 사건 발생 5년 뒤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중석불 사건은 이승만 정권 시기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자 경제 범죄였고, 정경 유착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지만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국민 경제에 해악을 끼쳐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중석불 사건은 이후 한국 정재계의 뿌리 깊은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의 시작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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