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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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棜所堰 |
영어음역 | Eoso-eon |
이칭/별칭 | 어흔언(於欣堰)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수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 읍내면에 있던 제언.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제언의 축조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우선 태종과 세종의 적극적 정책으로 조성된 제언 사업은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를 통해 확인된다. 경상도 지역에만 721개의 제언이 축조되고 동래부에도 6곳에 설치되었다. 한편 건국 초의 제언 수축은 18세기 말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 “전국에 제언이 설치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19세기 동래부에는 제언이 20곳으로 대폭 늘어나는데, 어소언(棜所堰)[어흔언(於欣堰)]은 이 시기 수축된 것이다.
어소언의 규모는 둘레 약 46.97m[155척], 평균 수심 약 1.52m[5척]이었다. 어소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32년 편찬된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이다. 이후 『동영지(萊營誌)』[1850]를 거쳐 『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1868], 『동래부 사례』[1895]까지 이름이 확인된다. 하지만 『동래군지(東萊郡誌)』[1937] 제언조의 명단에는 빠져 있는 것으로 볼 때 1909년 수리 조합 조례 발표 이후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동래부 읍지』를 보면 어소언은 읍내면에 위치하고, 같은 시기 읍지(邑誌)류에는 부(府)에서 약 4㎞[1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며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동래부 사례』[1868] 제언조에 “어흔[소]언은 동래부 남쪽 10리에 있다. 방죽의 둘레는 155척이며 물 깊이는 5척이다[於欣堰 在府南十里 周一百五十五尺 水深五尺]”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