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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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面競馬場 |
영어의미역 | Seo-myeon Horse-racing Field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64-3|연지동 13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석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과 연지동 일대에 있던 상설 경마장.
[건립 경위]
1921년 4월 전조 경마 대회(全朝競馬大會)가 부산진의 해안 매축지(埋築地)에서 개최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에서는 조선방직 광장이나 연산리 경마장 등 임시 경마장을 전전하며 경마 대회가 열렸다. 1926년 부산일보사 사장 아쿠타가와 마사시[芥川正]를 주축으로 한 일본인 지역 유지들이 자본금 4만 엔을 바탕으로 부산경마구락부를 조직해 1927년 7월 당국의 인가를 받아 상설 경마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건립된 것이 서면 경마장으로, 1930년 10월 27일 공사가 시작되어 11월 18일 준공하였고 1931년 개장하였다.
[변천]
개장 이후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1945년 8월까지 일본군 수송 부대인 아카츠키[暁] 부대의 관리에 들어가서 미얀마·인도네시아·필리핀 등에 조선 젊은이들을 징용 보내기 위한 임시 훈련소, 전쟁 물자 야적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9월 29일 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서면 경마장은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설치되어 경마장으로의 이용이 중단되었다. 서면 경마장을 사용하지 못하던 1946년 봄에는 부산진구 연지동 일대의 국군이 사용하던 국유지를 임대하여 임시 시설을 갖추어 경마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1949년 미군정이 끝나면서 같은 해 가을 서면 경마장이 다시 개방되었고, 1956년 봄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서면 경마장 터에 설치된 주한미군 기지] 동쪽 부산진구 범전동 산 2번지 일대 골짜기를 깎아 길이 360m 미니 트랙을 설치하여 경마를 열었다. 당시 경마장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기수 7명과 현지 기수 3명에 승용마와 마차마 등 현지에서 조달한 조랑말 70여 마리가 있었다.
1957년 봄부터 100환짜리 마권을 발매하였는데 거기서 무려 3,800배가 터져 국내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입장객은 평일엔 300~400명에 불과하였으나, 휴일에는 1,500명이 넘어 서울을 능가하는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초여름 경마장에 깡패들이 모여 들며 승부 조작 등을 요구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경마장 운영이 중단되었고, 캠프 하야리아 관내에 위치한 서면 경마장은 이후 시민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구성]
서면 경마장은 장방형의 경주로와 심판석, 단차를 두고 설치된 관람석, 경기에 출장하는 말들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예시장[경주로 출장 전까지 경마 팬들이 출주마의 건강 상태, 걸음걸이 등을 관찰해 우승마를 예상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말들을 미리 선보이는 장소], 사무소, 마구간, 기타 부속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황]
서면 경마장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미군의 보급 기지인 캠프 하야리아가 들어서면서 약 100여 년간 이방인의 땅으로 존재하다가, 2004년 한·미 간 주한미군 재배치와 관련한 합의에 따라 부지의 조기 반환이 이루어져 2010년 1월 13일 부산 시민에게 돌아왔다. 반환 당시 이곳에는 마권 판매소, 경주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011년 시민 공원 등 문화·녹지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 완공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