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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270
한자 風水地理
영어음역 Fengshui
영어의미역 Geomancy
이칭/별칭 풍수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희열

[정의]

부산 지역에서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땅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개설]

풍수지리는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킨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 사상이다. 산(山)·수(水)·방위·사람 등 4가지 요소를 조합하여 구성하며, 『주역(周易)』을 주요한 준거로 삼아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논리로 체계화하였다.

풍수지리는 풍수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간룡법(看龍法)·장풍법(藏風法)·정혈법(定穴法)·득수법(得水法)·좌향론(坐向論)·형국론(形局論)·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 등의 지세를 살피는 원리를 통해 명당을 찾고자 한다. 풍수는 도읍이나 군현(郡縣), 혹은 마을 등 취락의 입지를 잡는 양기 풍수(陽基風水)와 개인의 주택 입지를 선정하는 양택 풍수(陽宅風水), 묫자리를 잡는 음택 풍수(陰宅風水) 등으로 나뉜다. 세 가지는 구분되나 술법과 본질은 동일하다.

풍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용어로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전주작(前朱雀)·후현무(後玄武)라는 용어이며,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라는 표현도 익숙하다. 좌청룡·우백호·전주작·후현무는 땅 주변의 산세를 일컫는 표현이며, 배산임수는 형세를 갖춰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흘러 나가는 전통적인 입지 선택에서 좋은 땅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배산임수의 형세를 갖춘 땅에 읍성의 위치를 정하고 사람들이 살아왔다.

전통적인 풍수의 개념을 접근할 때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수에 대한 설을 통하여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산광역시의 경우에는 부산 전체를 아우르는 풍수의 개념이 부재하다. 이는 동래읍성과 부산포, 낙동강변과 기장 권역 등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들이 대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통합되어 하나의 광역시로 성장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부산 지역은 풍수적으로 볼 때 동래와 해운대 및 기장 등 권역별로 다른 형세를 지닌다. 또한 부산은 해안가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진성(鎭城)[수군들이 전투를 위하여 해안 벽에 쌓는 성곽]과 수영(水營)[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軍營)]이 즐비한 관방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동래의 풍수]

동래는 예로부터 금정산(金井山)을 진산(鎭山)[고을의 뒤에 있는 큰 산,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주산이라고도 함]으로 하여 태백산의 정기가 이어져 내려온 남단부에 해당한다. 계명봉(鷄鳴峰)에서 남동진한 기맥이 개좌산→ 구곡산→ 장산(萇山) 등으로 이어지며 좌청룡이 되고, 또 금정산에서 금정산성→ 금정봉→ 금용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백호가 된다. 금정산 계명봉에서 남진한 용맥이 수영강온천천을 사이에 두고 뻗어 내리고, 두 물이 합수한 지점에서 용맥이 멈춤으로 지기가 매우 왕성한 터이다. 동래로 진입하는 수구가 좁고 그 안쪽에 마치 삼각주처럼 평탄하고 넓은 분지에 위치하여, 동래는 대를 이어 부를 이룬 명당으로 보고 있다.

동래읍성의 지세를 세부적으로 보면 금정산을 조산으로 하여 윤산(輪山)[동래 쪽에서 보면 산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둥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과 진산인 마안산(馬鞍山), 그에 대응하는 황령산(荒嶺山)배산(盃山)[동래읍성의 안산], 농주산[현재의 부산동래경찰서 자리에 있던 작은 구릉지로 일제 강점기 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농주산 터라는 명칭으로만 그 위치를 알게 함]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온천천이 휘돌아 가며 배산임수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윤산은 구월산(九月山)으로도 부르는데, 계명봉에서 남진한 지맥이 회동 저수지와 온천천 사이를 좁게 뻗어와 부곡동에 솟은 동래의 진산이다. 남쪽에 위치한 황령산은 안산이 된다.

[비보로 본 부산 풍수]

비보(裨補)는 풍수의 중요한 술법 중 하나로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실한 곳으로 바꾸려고 하는 방법이다. 비보는 목적에 따라 첫째, 국토 비보(國土裨補)로 나라의 중흥을 위하여 절·불상·탑 등을 세우는 것으로 산천 비보(山川裨補)라고도 한다. 예로는 나라의 중흥을 위하여 건립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들 수 있다. 둘째, 동수 비보(洞藪裨補)로 마을 한편에 송림을 가꾸어 나쁜 기운을 막는 것이다. 하회 마을 등 전통 취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셋째, 지명 비보(地名裨補)로 지명을 통하여 풍수 형국과 조화를 이루어 좋은 기운을 붙잡는 것이다. 동래 지역은 지명 비보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넷째, 화기 비보(火氣裨補)로 강한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터 앞에 연못을 조성한다거나 해태상 또는 거북이상을 설치하는 것이다. 서울의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광화문의 해태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동래의 지명 비보를 보면, 동래현의 진산인 마안산은 형세로 볼 때 용의 형상으로도 학의 형상으로도 보는 여러 설이 있다. 이 중 학이 춤을 추고 있는 형상으로 보며 동래의 지명 비보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안산 주변으로 학소대 등 학과 관련된 지명이 있어 설명 가능한 부분도 있다. 동래현은 학의 부리 앞 진혈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부변동의 이름이 풍수적 발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본다. 복이 샘처럼 솟아나는 복천동(福泉洞), 편안하고 장수하는 수안동(壽安洞), 백성이 즐거움을 누리는 낙민동(樂民洞),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동(安樂洞) 등이 그것이다.

연산동(蓮山洞)은 습지가 많아 연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구황령산 정상에 올라서 연산동 일대를 보면 마치 연꽃 봉우리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연꽃은 물에서 사는 식물이므로 이는 물이 넘친다는 의미가 된다. 동래현을 기준으로 보면 남쪽에 물이 넘치니, 넘치는 물이 동래 쪽으로 밀려오면 물바다가 되어 발복은 고사하고 수장되어 망하는 형세가 된다. 때문에 연산동의 물을 막아 내기 위해 지명 비보로 거제동(巨堤洞)이 되었다고 한다. 거제동은 거대한[巨] 제방을[堤] 쌓아낸다는 뜻이 된다.

해운대 신시가지 일대는 풍수적으로 봉황이 둥지를 향해 날아드는 비봉 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고 한다. 장산에서 동으로 내리뻗은 산줄기 중 옥녀봉이 봉황의 머리가 되는데, 이는 정확히 해운대 신도시 중심지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 마주하는 작은 언덕이 와우산(臥牛山)[달맞이 고개]인데, 그 아래쪽에 오산(梧山)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오산 공원은 현재도 개발하지 않고 자연 상태로 놓아두고 있는데, 이 오산 공원의 오(梧)자는 봉황이 좋아하는 오동나무로 봉황새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려는 지명 비보가 된다.

[식민 풍수]

일제 강점기 일본은 식민 통치를 하며 풍수 침략을 했다는 속설이 있다.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풍수적 침략 전반을 식민 풍수라고 한다. 특히 부산은 동래현의 풍수적 형세를 이루던 작은 언덕에 불과한 농주산의 파훼 등과 같이 일제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또한 지명의 변화 과정에서 풍수적 침략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 지명의 변화

일제의 한반도 지명 변경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전에는 한반도 땅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 풍수 형국을 왜곡하거나 중요한 바다와 섬을 일본의 것으로 개칭하였고, 이후에는 생활 공간과 주요 상징 공간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개명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우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반도의 땅 모양이 토끼 형상이라는 왜곡과 함께 호미곶이 장기곶으로 바뀐 일이다. 부산에서는 영도의 신령한 산 봉래산이 오랫동안 고깔산으로 불려진 것이다. 산의 형세가 고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나, 신선이 사는 신령한 봉래산의 명칭을 마를 고(枯)에 목마를 갈(渴)자를 써서 기를 말린다는 의미로 붙였다고 한다. 또한 부산포 일대의 진산을 보는 엄광산(嚴光山)을 고원견산이라는 일제식 지명으로 부르며, 옛 지명을 흔적도 없이 지우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엄광산우암 반도를 거쳐 오륙도까지 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명산이다.

2. 지형의 변화

부산의 풍수에 대해서는 그 지명과 국지적인 형국에 대해서만 전해지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가장 큰 명당으로 치는 용의 형상을 한 부산의 땅은 모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풍수 침략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두 곳이 동래읍성지중구용두산이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래읍성지의 형세를 “농주산은 동래부의 주산[마안산]이 앉아 있는 용의 형상인지라 그 앞에 있는 산을 농주[여의주]라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주가 여의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작은 언덕에 불과한 농주산을 파훼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중구용두산과 용미산의 예도 있다. 용두산은 용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머리이고, 그 꼬리가 용미산[현재의 시청 자리]이라고 한다. 용미산은 바다를 향한 언덕 같은 작은 산으로 경관이 좋았다. 이곳은 용이 동해에서 태백 산맥의 맥이 이어지는 끝자락에 오르니 상서로운 터로 보았다. 이에 일제는 용미산을 파훼하여 그 흙과 돌을 착평 공사(鑿平工事)[길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에 사용하고, 용두산에는 신사를 건립해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또한 용두산과 용미산 사이에 신작로와 전차 노선을 개설하여 쇠로 그 기운을 눌렀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용미산은 용의 꼬리가 아니라 풍수적으로 풀어 보면, 농주산과 마찬가지로 여의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제의 농주산과 용미산의 파훼는 용의 여의주를 빼앗아 이무기로 전락시켜 그 신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1944~1945년 사이에 미국 해군성이 정보 파악을 위하여 3,048m[1만 피트]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일제의 노골적인 풍수 침략의 증거를 발견하였다. 풍수는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당시 부산의 건축물에 ‘대일본(大日本)’이라고 새겨놓은 글귀로 알 수 있다. 용두산에서 시내를 조망할 때 옛 부산교도소[현 서구 대신동 삼익 아파트]에 대(大) 자(字)를, 경상남도청[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일(日) 자를, 부산부청[현 부산 롯데 월드 부지]에는 본(本) 자가 드러나도록 건물이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풍수지리는 문화의 산물이며,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다. 오늘날 풍수지리가 부산의 형태를 만들지는 않지만, 그 과거의 형태가 지명과 건물 등 여러 형태로 남겨져 있다. 부산의 풍수에 대한 이야기는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맞닿아 있어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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