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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2938
한자 吳榮在
영어음역 O Yeongja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도미자이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화가
성별
대표경력 동주여자중학교 교사
출생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6~1948년 - 일본 도쿄 도와사가니 미술 학원
수학 시기/일시 1950~1953년 - 경주예술학교 미술과
몰년 시기/일시 1999년 3월 8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 - ‘화업 50년-오영재 초대전’ 개최
출생지 오영재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거주|이주지 오영재 이주지 - 부산광역시 영도구 광암길[청학동]
거주|이주지 오영재 이주지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학교|수학지 도쿄 도와사가니 미술 학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경주예술학교 미술과 - 경상북도 경주시

[정의]

1950년대 부산에서 활동한 화가.

[활동 사항]

오영재(吳榮在)는 1923년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서 태어났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 도쿄 아사카다니[何佐賀谷] 미술 학원에서 수학하였고, 경주예술학교 미술과[1950~1953]를 졸업하였다. 이후 울산제일중학교[1953~1956]와 울산여자고등학교[1956]에서 교편을 잡았다. 부산으로 이주해 온 것은 1956년이었다. 이 시기부터 1970년까지 해동중학교, 동주여자중학교, 평화고등학교, 청구중·고등학교,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영재는 구상 계열이었는데, 그 후 추상화로 전환하면서 자연 형태를 입방체의 면으로 해석하며 재구성하는 기법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 애호가들의 공감을 사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생활은 곤궁해져서 영도구 청학동 고지대 셋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영재의 이러한 생활을 안 화랑 경영자가 그에게 팔릴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달라며 미리 보수를 주었다.

그러나 오영재는 약속한 날짜보다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점의 작품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에 화랑 경영자를 찾아가 봉투를 내놓으며 아무리 애써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으니 용서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화랑 경영자는 오히려 자기가 무리한 부탁을 하여 괴롭혔다며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오영재는 그림의 세계, 또는 그림의 방식이 어떠하든 무릇 그림은 재물로 취급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명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림이 돈이나 명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은 추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62세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를 아끼는 친지들에 떠밀려 부산시의 창작 기금을 지원받고 1984년 유 화랑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오영재는 첫 개인전을 연 뒤 양산시 동면 법기리 수원지 아랫마을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1990년 다시 주변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10년 후인 1999년 암과 투병하는 중에 세 번째 개인전이 추진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국미술협회 출품[1965~1999], 후기회 창립 회원 및 회원전 출품[1970~1981], 영호남 원로 작가 초대전 출품[1989, 1990], 오영재 추상 작품 개인전[1984, 1990, 부산 유 화랑], 열매회 창립 회원 및 회원전 출품[1992~1999] 등을 하였다.

오영재의 작품은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즉 사실주의적 습작 과정의 제작[1943~1960], 구상화풍의 주된 작품에 겸해 추상 작품 시도[1961~1980], 추상 작품의 주된 제작에 겸해 구상화 제작[1981~1988], 일관되게 추상 작품 제작[1989~1999]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색면의 연쇄로 이어지는 풍경과 정물, 인물을 그린 오영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추상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색과 면이라는 두 가지 화두로 좁혀 들어간 뒤 결국 자유로운 색면들의 유희를 통해서 자신이 평생 갈구한 파라다이스를 구현하였다. 반추상 회화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1950년대의 추상 도입기와 1960년대의 모색기를 거쳐 1970년대 이후 특유의 색면 추상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1951년 작 「인물」은 꿈틀거리는 붓질이 살아 있는 초기작이다. 인상파 화법의 기본에 충실한 「인물」은 특유의 색면과 색감이 원초적인 형태로 묻어난다. 1956년 작 「정물」은 한 걸음 더 오영재 스타일에 접근한 인상파 회화의 정석을 보여 준다. 오영재는 모든 대상을 면으로 처리하였다. 숲과 바위와 나무와 산과 물과 하늘의 구름까지도 단정하고 깔끔한 색채와 붓질로 이뤄진 면들의 연쇄체로 그려 냈다.

1960년대부터 추상 작업을 시작한 오영재는 직육면체를 그리거나 완전 추상의 직전 단계로 접어든 색면들로 습작과 완성작을 남겼다. 197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형상을 해체하고 추상적인 색면만을 가지고 파라다이스라는 명제를 달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곡선을 사용하면서 풍경이나 정물에서 볼 수 없던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부산광역시립미술관에 소장된 1977년 작 「풍경」과 1987년 작 「산」은 절정의 기량을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엄격하게 분할한 면과 면의 사이로 빛이 교차하고 어스름한 푸른색 너머로 대기가 발색한다. 1970년대에는 주로 단색 평면 회화의 범주 안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졌던 데 비해, 198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다채로운 색감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직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꿈틀거리는 곡선으로 색면을 구성하면서 예의 파라다이스를 찾아 나갔다. 오영재는 절제된 언어로 ‘인간의 본질적인 소망’인 낙원을 시각화하고자 한 것이다.

[상훈과 추모]

1954년 대한미술협회 공모전에서 입선하였고, 1991년 예술인 문화 단체 삼량회의 문화상을 받았다. 사후인 1999년 송하 갤러리에서 ‘화업 50년-오영재 초대전’이 열렸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6.02.02 활동 사항 중 학력 오류 수정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 도쿄 아사카다니 미술 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이용자 의견
옥** <활동사항>중 일본에서의 학력기록은 잘못되었으니, 1946년부터 2년간 도쿄 아사카다니(何佐賀谷)미술학원을 수학한 것으로 정정바람. 참고자료로 옥영식의 <부산을 살다간 미술가열전100/오영재 화백>(예술부산,통권103호,2014년 1월호)를 보기 바람.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내용은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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