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1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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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田- |
영어의미역 | Seojeon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서전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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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감전리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감전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감전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감전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감전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2008년 - 행정동인 감전 1동과 감전 2동이 감전동으로 통합 |
자연 마을 | 서전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서전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1980년에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에 보면, “서감 마을은 감전동의 으뜸 마을로 서촌(西村)이라고 불렀으며, 동감 마을은 서감 마을 동쪽에 있어 동감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전동의 서쪽 강변에 강물에 의해 실려 내려 온 모래 퇴적과 괘내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흙모래가 쌓여 모래톱이 생성되는 등 변동이 많았다. 이러한 모래톱을 서쪽에 있는 뻘[개흙]이라고 서발, 새로 생긴 뻘이라고 해서 새뻘로 부르다 서벌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감전동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감전, 서전(西田)이라 불렀다.
[형성 및 변천]
서전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갯벌과 갈대 지대였던 이곳 사주가 농경지로 변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 지명이 나타나는 시기는 170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 옛 사상 지역 고문서 자료인 「사천면 전답재결영탈책(沙川面田畓災結永頙冊)」[1775]에 감동(甘同)과 함께 서전이 나온다. 감전동에는 옛 감동 마을 뒷산 계곡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동천이라 하였고,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은 서천이라 하였다. 이 동천과 서천의 좌우 둑이 모두 모래로 만들어져서 모래둑 또는 모래두리라고 하였다. 고문서인 「사상면 방경전말등록(沙上面防坰顚末謄錄)」에 보면, 1832년(순조 32) 감동 동천에 284명, 서천에 281명의 부역군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이 둑을 쌓은 후 서편 마을 동쪽에 새방네[新坊]라는 들판이 생겼다.
1882년(고종 19) 편찬된 「사상면 관소 감도 각리 작자 양원 성명 성책(沙上面貫所甘島各里作者兩員姓名成冊)」에 감동리와 서편리가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서전리는 서편리로도 부르다가 1914년 감동리와 합쳐져 감전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다. 1978년 북구에 속하였으며,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사상구가 신설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서전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서전 마을 서쪽으로 감전수로가 흐르고, 감전수로 넘어 낙동강이 흘러서 예전에 습지였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서전 마을은 옛 감동·서편, 지금의 사상구 감전 1동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형성된 자연 마을이었다. 현재는 사상 산업 단지, 사상 기계 가공 단지, 감전 야생화 단지 등이 들어서 있으며, 동서 고가 도로가 지나고, 서감전 할매 당산이 있다. 예전 강변 쪽에 있던 뻘 지대는 갈대밭으로 변하였다. 여름밤 갈대밭에서 갈게를 잡는 횃불이 멀리서 내려다보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갈게로 게장을 담가 먹었다고 한다. 사상 팔경(沙上八景)에 나오는 제1경인 ‘칠월 해화(七月蟹火)’는 감전동의 서쪽 갈대밭에서 게를 잡기 위해 밝힌 횃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마을이 강변 들판에 위치하여 폭풍우나 강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강변 갈대밭을 개간하여 벼농사, 보리농사, 밀농사를 주로 하였다. 서편 마을에는 산이 없어 돌담이나 흙담이 적고 갈대로 울타리를 쌓고 대문도 갈대로 엮은 문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 들어서면 낙동강에서 잡은 재첩 껍데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큰길 옆에는 군데군데 재첩 껍데기가 무덤처럼 쌓여 있고, 비포장도로의 파인 곳을 재첩 껍데기로 메우고 집 주위나 대밭 등지에도 재첩 껍데기가 수북이 쌓여 재첩 껍데기 마을로 불릴 정도였다.
낙동강 재첩 하면 사상구 엄궁동·감전동·삼락동과 사하구 하단동·신평동이 유명하였다. 삼락동과 엄궁동은 배로 재첩을 잡았으나, 서전 마을에서는 가족과 일가친척 모두 직접 강에 나가 재첩을 채집하여 돌아왔다. 8·15 광복 후 서면·동래·해운대 지역까지 새벽 거리를 누비며 “재첩국 사이소!” 하고 외치는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이곳 서전 마을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이 잡히던 재첩은 1968년 사상 공단이 조성되면서 오·폐수의 낙동강 유입으로 생산량이 줄어들다가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준공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네를 사랑하는 뜻으로 토박이 동민 중 언론계 출신인 최현태가 다음과 같은 「서감전 애향가」를 작곡하여 당산 입구에 노래비를 세워 놓았다.
「서감전 애향가」
1. 남편은 논밭 매며 아낙네들은/ 제첩국 팔러 가던 아… 내 고향(故鄕)/ 가난했던 그 시절을 너는 아는가/ 친구여! 서감전(西甘田)이여!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피땀 흘려 가꾼 사랑 어찌 잊으랴.
2. 거치른 빗바람을 뚫고 헤치며/ 청춘(靑春)을 불태우던 아… 그 세월(歲月)/ 태산 같던 이 가슴을 너는 아는가/ 친구여! 서감전(西甘田)이여! 사상(沙上) 들판에/ 눈물 뿌려 심은 우정(友情) 어찌 잊으랴.
3. 洛東江(낙동강) 칠백리(七百里)에 새봄이 오고/ 고난(苦難)의 가시밭길 흘러가며는/ 너도나도 옛말하고 웃고 지내리/ 친구여! 서감전(西甘田)이여! 끓는 심장(心臟)에/ 꿈을 키워 맺은 정(情) 어찌 잊으랴.
서감전 할매 당산[사상구 감전 1동 920-8번지]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1943년에 지어진 제당은 기와 팔작지붕에 벽은 흙벽으로 쌓아 시멘트로 마감한 구조물이다. 할매 제당 옆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다. 제의 날짜는 음력 12월 14일 밤 자정인데, 근래에 와서는 1년에 한 번 오전 11시경에 지낸다. 특이하게도 이 제당에 와서 기제사를 정성껏 올리면 자식을 얻는다는 설이 있다. 예전 강에 의지하여 살았을 때는 용왕제도 지냈다고 한다. 사상구 감전 1동 122-1번지에 자리 잡은 서감초등학교의 교명인 ‘서감’에서 옛 이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