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신암 마을[남산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153
한자 新岩-南山洞-
영어의미역 Sinam Village[Namsan-dong]
이칭/별칭 신암리(新岩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신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740년 - 동래군 북면 남산리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남산동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남산동에서 부산직할 북면출장소 남산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북면출장소 남산동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남산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 부산직할시 동래구 남산동에서 부산직할시 금정구 남산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신암 마을 -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신암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신암(新岩) 마을의 옛 이름은 서검뜸이다. 1720년(숙종 46)경 동래 무청 교련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 초건(楚健)의 셋째 아들 준업공(俊業公)이 입향(入鄕)하여 서검 서당(書劍書堂)을 열었고, 이에 서검(書劍)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신암 마을은진 송씨가 1720년경 입향하며 형성한 것으로 보이나,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신암 마을이 속한 남산동『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면 각리 원근정도조(各面各里遠近程道條)에 동래부 북면 남산리(南山里)로 처음 확인된다. 신암 마을에 대해서는 김한주(金漢柱)의 준호구에 1898년(고종 35) 2월부터 신암동(新岩洞)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설에는 일제 강점기에 전통적인 옛 지명 말살 정책으로 선대의 서검 정신을 없애기 위해 신암으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남산리에 한씨(韓氏) 3호, 김씨(金氏) 12호, 신씨(申氏) 1호, 이씨(李氏) 6호, 최씨(崔氏) 4호, 송씨(宋氏) 5호, 서씨(徐氏) 1호, 우씨(禹氏) 1호, 박씨(朴氏) 1호, 윤씨(尹氏) 1호, 강씨(姜氏) 2호, 장씨(張氏) 1호, 정씨(鄭氏) 1호, 신씨(辛氏) 1호, 고씨(高氏) 1호, 오씨(吳氏) 1호 등 42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3년 1월 1일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동래군 북면 6개 동은 북면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북면출장소가 폐지되고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1월 1일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신설구인 금정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신암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신암 마을 지역은 웃각단, 중간각단, 아랫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정산(金井山) 중에서도 산세가 가장 수려한 용호봉(龍虎峰) 칭디미[무명봉]가 서쪽에 위치하여 배후 산지 구실을 한다. 북쪽으로는 천지등(天地嶝)과 천지샘을 발원지로 하는 천지등 계곡이 있고 남쪽으로는 용호등(龍虎嶝)과 용호샘을 발원지로 하는 용호등 계곡이 있다. 두 계곡에 흘러내린 물줄기가 솔밭 공원[장기 터]에서 합수하여 물골, 국시밑, 새들, 홀랄래 거랑을 거쳐서 범어천[온천천]으로 흘러드는데, 마을 동쪽으로 범어천(梵魚川)이 흐르고, 하천을 지나 소산(蘇山)이 있다.

[현황]

신암 마을은 1970년 이전까지는 30가구, 150여 명이 살았다. 1970년대 남산동 구획 정리 사업 지구에서 제외되며 옛길은 그대로 남겨진 채 주거 밀집 지역으로 변하면서 옛 흔적이 남겨져 있다. 주변에 부산 외국어대학교, 부산과학고등학교, 남산고등학교, 남산중학교, 금정중학교, 남산초등학교, 금샘초등학교, 재단법인 대한불교 조계종 안국선원, 무명사, 회룡정사, 남산성당, 금정순복음교회, 생명수교회, 이슬람 부산성원, 서검재(書劍齋) 등이 있으며,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금정산성 등이 인접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