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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교 부산분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749
한자 大社敎釜山分院
영어의미역 Busan Branch of Daesagyo
이칭/별칭 출운대사교 초량교회소,대사교 초량교회소,대사교 부산교회소
분야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3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
설립자 권대보교(權大輔敎)|야상웅치(野上雄治)
설립 시기/일시 1912년 12월 27일연표보기 - 대사교 초량교회소로 설립 인가
해체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이후연표보기 - 해체
이전 시기/일시 1913년 7월 2일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중구 동광동 5가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21년 이전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5가에서 부평동 3가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41년 1월 17일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3가에서 신창동 1가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921년 이전연표보기 - 대사교 초량교회소에서 대사교 부산교회소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1년 1월 17일연표보기 - 대사교 부산교회소에서 대사교 부산분원으로 개칭 인가
최초 설립지 대사교 초량교회소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구 부산부 사중면]
주소 변경 이력 대사교 초량교회소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5가[구 부산부 본정 5정목 4]
주소 변경 이력 대사교 부산교회소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3가[구 부평정 3정목 45]
주소 변경 이력 대사교 부산분원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부산부 서정 1정목 38의 2]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대사교 소속 교당.

[설립 목적]

일본 바쿠후[幕府]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습합 신도, 즉 ‘신종교(新宗敎)’는 봉건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작용 등을 파고들어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단기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대사교(大社敎)[다이샤교] 역시 그 중 하나로 보통 출운대사교(出雲大社敎) 혹은 이즈모사마[出雲さま]로 불리며, 이즈모[出雲] 지방을 지배하던 이즈모코쿠소가[出雲國造家]의 당주(當主)인 센게 다카토미[千家尊福]에 의해 1876년 창시되었다. 그 숭배의 대상으로 일본 신화 속 인물이자 토착신들의 두령인 대국주신(大國主神)을 주신으로 하고 있다. 1882년 일본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되된 13개의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 개항 이후 일본의 타 신종교와 함께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 진출하여 그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변천]

1912년 12월 27일 ‘대사교 초량교회소(大社敎草梁敎會所)’로 인가를 받아 부산부 사중면[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부근]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13년 1월 31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같은 해 7월 2일 본정 5정목 4번호[현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5가]로의 이전을 인가 받았다. 이후 1921년 이전에 ‘대사교 부산교회소’로 개칭하고 포교소의 위치도 부평정 3정목 45번지[현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3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1월 17일에는 ‘대사교 부산분원(大社敎釜山分院)’으로 승격되었고, 서정 1정목 38의 2번지[현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로 이전을 다시 인가받았다. 대사교 부산교회소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인물은 권대보교(權大輔敎), 야상웅치(野上雄治) 등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교 의례와 포교가 그 주된 활동이었으며, 대제일(大祭日)은 매년 10월 15일이었다. 부산부의 조사에 따라 신도 수 또는 신도 호수 변화를 보면 우선 1910년대에 신도 수는 약 340명이었고, 1921년 신도 수는 일본인 2,394명, 1922년 신도 수는 일본인 2,632명이었다. 그리고 1923년에 신도 호수는 660호였고, 1924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701호, 1927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688호, 1928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702호, 1929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705호, 1930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708호, 1931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3,165호, 1932년·1933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3,186호, 1934년 신도 호수는 일본인 3,219호였다. 1936년 신도 수는 일본인 3,210명이었다. 이를 통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대사교를 포함한 일본의 신종교는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의의와 평가]

메이지기 이래 대사교 등 일본의 신종교는 천황제 근대 국가를 지지했으며, 본국을 넘어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의 일제의 문화적 침투의 양상을 알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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