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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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旭館 |
영어의미역 | Ukgwa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창신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병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중구 창선동에 있던 영화관.
[개설]
부산 지역에 대중문화 공간인 상설 극장이 설립된 계기는 1876년의 부산 개항이었다. 서양은 극장 문화가 일찍이 꽃피웠던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통적인 연극 형식의 탈춤, 꼭두각시놀음 등을 보여 주던 남사당패가 떠돌며 임시 무대를 사용한 무형 극장 수준이었다. 개화기 부산에서 태동되는 극장을 알아보려면 일본인 전관 거류지(全管居留地) 형성과 정착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욱관(旭館)이 개관된 중구 창선동은 개항 이후에 일본 거류민 지역으로 상권 및 주거 지역으로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립 경위]
욱관은 1912년에 행정 1정목[현 중구 창선동]에서 연극 공연장으로 개관되었다.
[변천]
개관 이후에 욱관은 부산에서는 가장 먼저 상설 영화관으로 구조를 변경하여, 1914년 3월 12일부터 영화를 상영하여 본격적인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욱관이 상설관으로 경영을 개시한 1년 후인 1915년 3월 9일에 보래관(寶來館)이, 같은 해 12월 19일에는 행관(幸館)이, 1916년 1월부터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가세하면서 4개의 영화관이 경쟁 경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1916년 1월 11일 이후부터 욱관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폐관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폐관 사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욱관은 지나치게 흥행을 겨냥한 과다한 경쟁과 공연물, 영화의 프로그램 수급 불균형 등의 운영 미숙으로 경영난을 겪었다. 그 결과 욱관은 영화 상설관으로 2년 남짓 경영되다가 화재 사고로 폐관되었다. 욱관에 관한 자료는 1914년에 경상남도청이 편찬하고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에 나와 있다. 같은 해 부산에 소재하고 있던 극장 행좌[남빈정]부터 부평정의 부산좌(釜山座)와 동양좌, 초량동의 초량좌, 절영도의 질자좌 5개소와 기석식 공연장인 행정의 욱관과 보래관, 본정의 변천좌 3개소 포함, 총 8개 극장의 현황이 수록되어 있는데, 욱관과 보래관은 각각 독립된 극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3월 10일에 박문당이 발행한 지도인 「부산 시가 전도」에서도 역시 행좌, 부산좌, 동양좌, 보래관과 함께 욱관이 상존하여 이를 재입증해 주고 있다. 『경상남도 안내』 마지막 장에는 변천좌, 보래관과 함께 욱관 광고가 소개되었고, 1915년부터 『부산 일보』와 『조선 시보』 영화 광고에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구성]
욱관은 기석식(奇蓆式)[현재의 영화관은 네모식으로 되어 있으나 기석식은 둥근 형태로 되어 있다.] 연극 공연장이었다. 일본 활동사진과 천연색 활동사진의 영화들을 공급받았던 욱관은 대부분 양화(洋畵)[외국 영화]와 일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1915년 4월 27일부터 5월 3일까지 1주간 프로그램은 총 6편으로 1일 주야 두 차례씩 상영되었다. 태서 소년극 「양몰이 소년」, 최장척 신파 비극 「의외의 초록」 전 4권짜리 구극 「우스다 하야도정 일대기」, 최장척 태서 대활극 「모타 보트」, 그 외 제명 미상의 실사[기록 영화] 1편과 골계[희극] 1편이었다. 영화는 작품 해설자인 일본인 변사[주임·보조·여변사로 구분] 6명이 상주하여 소개하였다. 작품 상영 후에는 10분간 휴식 시간을 가졌고, 전속 음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관객을 위한 서비스도 제공하였다.
[현황]
욱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찍이 폐관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리에는 1986년에 소극장 시네마 극장이 들어서 운영되어오다 이마저도 1996년에 폐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