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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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相生館 |
영어음역 | Sangsaeng Hall |
영어의미역 | Win-win Hall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성 |
[정의]
1916년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개관한 극장.
[건립 경위]
부산 남포동 일대는 일본의 전관 거류지였다. 일본인들의 거주가 급증하고, 영화 상영관 신설이 법령으로 공포되자 본격적으로 많은 영화관이 이 일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생관(相生館)은 찌루이 지로가 기존의 극장인 변천좌를 인수하여 이를 개축하여 개관하였다. 상생관은 1916년 10월 31일에 지금의 중구 동광동에서 개관하였다.
[변천]
상생관은 주식회사인 일본활동사진의 특약점으로 각각 일본 배급사와 맺은 계약을 앞세웠다. 1946년 1월 1일에 일본식 극장 이름에서 새로운 이름을 공모하여 대중 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48년 12월에는 부민관으로, 1953년 8월에는 시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후 극장 시설의 노후로 2번관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결국 1976년 6월 1일에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구성]
상생관 개관 당시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가 들어와 부산은 그야말로 채플린 천국이었다. 초창기부터 「채플린의 권투」, 「채플린의 빵집」, 「채플린의 백작」 등 채플린의 단편 희극을 상영하였다. 또한 「타잔」, 「판토마」, 「묵시록의 4기사」, 「거인 정복」, 「탄식의 피에로」, 「보제스트」, 「돈판」,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부활」, 「톱 핫드」 등 화제작을 많이 상영하였다. 1920년대에는 연속 활극 시리즈가 최고 화제였다.
재상영 등 프로그램 수급이 불안하였던 상생관은 「저주의 집」 이후로 펄 화이트(Pearl White)가 마지막 출연한 파테사(社)의 연속 대활극 「암흑의 비밀」, 엘로 링컨 주연의 「대 타잔」, 월리엄 던컨(William Duncan)의 「힘이 넘치는 철완」, 루스 롤랜드의 「황원 비밀」 외에 「맹수와 여신」, 「죽음의 소용돌이」, 「영웅 키드」, 「폭탄아」, 「대모험왕」 등을 상영했으나 프로그램 수급에서는 행관과 보래관의 강세에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
1920년대 상생관에서 상영된 주요 외화로는 「신이 버린 여자」[1917년 미국, 1921년 6월 15일 상생관 개봉], 「타잔」[1918년 미국, 1923년 1월 20일 상생관 개봉], 「판토마」[1913년 프랑스, 1923년 4월 28일 상생관 개봉], 「묵시록의 4기사」[1921년 미국, 1924년 1월 7일 상생관 개봉], 「탄식의 피에로」[1924년 프랑스, 1926년 10월 14일 상생관 개봉] 등이 있었다. 1920년대 제작된 조선 영화는 부산의 경우 상설 영화관인 행관, 보래관과 함께 상생관에서도 일본인 경영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상영되지 못하였다. 1930년대 들어 상생관은 1932년 2월 12일에 쇼치쿠[松竹] 키네마 가마다[薄田] 촬영소가 만든 제1회 작품 「마담과 마누라」[전 10권]를 상영하여 발성 영화관 시대를 주도하였다.
상생관 이후 부산 흥행가는 발성 영화관 시스템으로 모두 바뀌었다. 그러나 상영작의 수급난으로 무성 영화와 함께 동시에 공존하는 기간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1930년대 상생관에서 상영된 주요 외화로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년 미국, 1931년 4월 10일 상생관 개봉], 「최후의 중대」[1929년 독일, 1931년 10월 13일 상생관 개봉], 「당근」[1932년 프랑스, 1934년 10월 19일 상생관 개봉] 등이 있다. 1930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 영화는 처음에는 상영이 전무하였으나 전쟁 준비 때문에 필름 수급 등의 문제가 대두되어 정책 변화가 일어나면서 「춘향전」상영 이후부터 총 55편이 110회에 걸쳐 상영되었다.
그러나 상생관에서는 1편만이 상영되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부산에서 상영된 외국영화는 미국 영화가 강세였으나 독일 영화 역시 많이 상영되었다. 1937년 7월 27일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가 전시 체제령에 들어가면서 일지 교전을 촬영한 전쟁 뉴스 영화는 1937년 7월부터 1938년 1월까지 부산의 상생관을 비롯한 상설 영화관에서 지속적으로 상영되었다. 1938년 8월부터는 조선 청년들에게 강제 지원병 제도를 선포하고 그 후 징용령이 공표되기까지 이들 뉴스 영화를 통해 황군 신민화를 주도 면밀하게 강요하였다.
예컨대 상생관에서는 「북지 상해 사변」[1937년 8월 22일], 「북지 상해 일지」[1937년 9월 30일], 「동일대매 아사히 세계 경일 발성 사변」[1937년 12월 18일] 등과 같은 뉴스 영화나 제국 재향 군인회 지도 아래 제작된 국방 사상 선도 영화 「조국을 지키다」[1932년 7월 14일]와 같은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결국 1930년대와 1940년대 부산에서의 영화는 내선일체의 식민 정책과 침략 전쟁의 도구로서 이용되었다. 전쟁 위험이 고조되던 시기에 부산 지역의 영화관의 흥행은 괜찮은 편이었다.
1939년에 소화관이 4만 3025명[입장료 1만 7772원 70전]의 수입을 얻었다면, 상생관은 2만 8276명[입장료 1만 5040원 10전]으로 2번째의 수입을 얻었다. 1940년에는 닛카츠 계열의 보래관이 3만 9997명[입장료 1만 9816원], 도호계의 소화관에 3만 3000명[1만 8000여 원]에 이어 쇼치쿠계의 상생관은 2만 5849명[1만 4000원]의 수입을 얻었다. 1940년~1944년 상생관에서 상영된 외국 영화로는 「M」[1931년 독일, 1940월 7월 25일 상생관 개봉] 등이 있었다.
상생관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이르러 부민관으로 불렸는데, 이 시대의 영화를 소개하면, 1951년 7월 2일에는 부민관에서 「정의의 진격」이 개봉되었으며, 7월 19일에 「진격만리」[신경균], 10월 15일에는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이 개봉되었다. 1952년 2월 23일에 「낙동강」[전창근], 3월 21일에 「정의의 진격 제 2부」, 6월 29일에 「성불사」[윤봉춘], 11월 24일에 「베일의 비밀」[어요선]이 개봉되었다. 1953년에는 5월 16일 「고향의 등불」[장환영], 11월 28일 「최후의 유혹」[정창화]이 개봉되었다.
[현황]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상생관 자리인 광복동 입구에 한국투자증권 부산지점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