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중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387
한자 衆報
영어의미역 Jungbo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문
관련인물 김형두|이갑기|전성호|박기출
판형 타블로이드판[25.4×37.4㎝]
창간 시기/일시 1945년 9월 1일연표보기 - 창간
폐간|종간 시기/일시 1962년 8월 1일연표보기 - 폐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9월 6일연표보기 - 『중보』에서 『부산 일보』로 제호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9월 20일연표보기 - 『부산 일보』에서 『민주 중보』로 제호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2월 1일연표보기 - 『민주 중보』에서 『민주 신보』로 제호 변경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 60-1]
제작|간행처 『중보』 간행처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정의]

해방 후 부산에서 가장 처음 창간된 국문 신문.

[창간 경위]

일제 강점기 발행되었던 『부산 일보』는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판 신문을 그대로 발행하였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 거류민 신문을 만들겠다는 사장 아쿠타가와 타다시[芥川正]와 일본인 직원들의 구상은 당시 『부산 일보』에 남아 있던 한국인 직원들의 실력 행사로 무력화되었다. 신문을 간행하기 위해 한국인 사원들은 9인 위원회[위원장 겸 편집국장 이갑기, 총무국장 김형두 등]를 조직해 준비에 착수하였는데 이후 두 명이 빠진 7인회가 중심이 되어 신문 운영의 주체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내부의 일본인을 몰아내고 1945년 9월 1일 『중보(衆報)』를 창간하였다.

[형태]

타블로이드판[25.4×37.4㎝] 두 면으로 발행되었다.

[구성/내용]

중립적 논조를 표방한 『중보』의 1면은 전국 뉴스와 외신을 싣고, 2면은 부산 등 경상남도 지방의 소식을 게재하였다.

[변천과 현황]

『중보』가 창간되고 며칠 뒤인 1945년 9월 6일자 지면을 통해 『부산 일보』라는 종래의 제호를 다시 사용한다는 사고(社告)가 게재되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9월 20일자부터 『민주 중보』로 제호를 바꾸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미군의 진주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즉 미군정을 의식해 기존의 제호 『중보』 앞에 ‘민주’를 붙여 『민주 중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부산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부산 일보』 사옥과 시설을 접수한 것이 9월 17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46년 6월 3일 미군정의 개입으로 『민주 중보』의 사옥은 대창정 4정목[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에서 초량정 593번지 협동인쇄소로 옮겨야 하였다. 이 사옥은 박수형에 양도되어 1946년 9월 10일 『부산 일보』의 창간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옥을 넘겨준 『민주 중보』는 사무실을 옮겨 발행을 계속하였지만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립적인 논조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수차례 테러를 하기도 하였는데 1947년 3월 25일 괴한 3명이 침입해 사원 두 명에게 상해를 입히고 신문 700부를 탈취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1948년 『중보』[당시 『민주 중보』]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였던 일본인 관리들이 부산에 나타났음을 보도하였는데 이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파문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1948년 6월 16일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50년 2월 1일 제호를 『민주 신보』로 바꾸어 발행하다가 5·16 군사 정변 후인 1962년 8월 1일 시설 기준 미달로 폐간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방과 미군정으로 새로운 세상이 전개되면서 오랫동안 볼 수 없던 국문 신문이 출현하자 『중보』는 창간 이후 1년 이내에 부산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