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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를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72
한자 太宗臺-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Taejong-d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태종대(太宗臺)」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등부산차나산운(「登釜山次螺山韻)」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태종대(太宗臺)」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관동사유감 효악부체오장(觀東史有感 效樂府體五章)」
관련 장소 태종대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태종대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의 문학 작품.

[개설]

‘태종대(太宗臺)’라는 명칭은 신라의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이곳에 찾아와서 활을 쏘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태종대가 태종 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에 와서 활을 쏘고 군사를 조련하여 삼국 통일의 터전을 닦았다는 설과, 삼국 통일을 이룬 뒤 시종과 더불어 한유(閒遊)[한가히 놂]하면서 활을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은 삼국 통일이 되기 전에 타계하였기 때문에, 태종대에 와서 군사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태종대’라는 이름은 태종 무열왕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기암절벽 등 이곳의 빼어난 해안 절경을 배경으로 활을 쏘며 즐긴 것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태종대는 가뭄이 있을 때에는 동래 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태종대는 뛰어난 절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래 부사나 혹은 통신사행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다양한 고전 문학을 남겼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태종대를 노래한 문학은 조선 시대에 동래 부사로 재직하면서 태종대를 읊은 한시, 조선 후기 통신사의 사절단 일행들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종대를 경유하거나 그곳에 들러 남긴 한시, 역사를 회고하다가 감회에 젖어 남긴 한시, 신선대망부석(望夫石)에 관한 전설 등이 전하고 있다.

[태종대를 노래한 한시]

1. 동래 부사가 태종대를 읊은 한시

조선 시대에 동래 부사로 재직하면서 태종대를 읊은 한시에는 윤훤(尹暄)[1573~1627]의 「태종대(太宗臺)」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태종대」가 있다. 윤훤의 작품에는 신라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를 찾은 인연을 언급한 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흘러 대의 이름만 남아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에 동래 부사를 역임했던 이춘원「태종대」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성조란기주차산(聖祖鑾旂駐此山)[거룩한 임금의 말방울과 용 깃발이 이 산에 머물렀다니]

천추유사배용안(千秋猶似拜龍顔)[천추의 세월에도 용안을 배알하는 것은 오히려 같았으리라]

영령상재균천리(英靈想在鈞天裡)[영령의 생각은 균천(鈞天) 안에 있었을 터인데]

욕주함소일상반(欲奏咸韶一上攀)[한 번 잡고 올라가서 함소(咸韶)를 연주하였으면].

이춘원 역시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에 머물렀던 역사적 유래에 착안하여 시상(詩想)[시를 지을 때 시인에게 떠오르는 착상이나 구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태종 무열왕이 천하를 다스릴 기상과 의지가 있었음을 기리면서 함께 함소[천자의 악곡]를 연주해 보고 싶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태종 무열왕의 혜안과 늠름한 풍모나 기상에 대한 예찬이 드러나 있지만, 태종대가 그의 발걸음을 머물게 했을 정도의 빼어난 승경을 지녔음도 아울러 나타내고 있다.

2. 통신사 사절단이 태종대를 읊은 한시

조선 후기 통신사 사절단의 종사관들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종대를 경유하거나 태종대에 들러 창작한 한시가 있다. 1643년(인조 21) 신유(申濡)[1610~1665]는 「해사록(海槎錄)」에서 부산에 올라 1643년 조선 통신사의 독축관으로 참여했던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1608~?]의 시를 차운하여 「등부산차나산운(登釜山次螺山韻)」을 지었다.

여기에서 “형승은 저기 저 태종대[形勝太宗臺]/ 섬들이 하늘 끝에 멀리 보이고[島嶼連天遠]/ 물결은 땅을 뒤흔드는 듯 몰아오네[波濤拔地廻]/ 사절들 여기 와 머물면서[使華留滯日]/ 경치를 구경하며 함께 서성거리네[登眺共徘徊].”라는 부분이 주목된다. 태종대의 신비로운 경치에 대해 섬들이 하늘 끝 멀리 보인다고 하고, 해수가 주회(周回)[둘레를 빙 돎]하는 지리적 특성을 물결이 땅을 뒤흔드는 듯이 몰아온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통신 사절단이 태종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구경하기 위해 머물다 갔음을 밝히고 있다.

또 신유는 「부산(釜山)」 절구 5수 중 ‘태종대’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선가하년차지래(仙駕何年此地來)[선가 어느 해에 이 땅에 오셨던]

지금신물호고대(至今神物護高臺)[지금토록 신물이 높은 대를 보호하네]

운간왕왕문생학(雲間往往聞笙鶴)[구름 사이로 이따금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소리 들리니]

의시매고호필회(疑是枚皐扈蹕廻)[아마도 매고가 호종했다 돌아옴인가].

신유는 이 작품에서도 태종대가 임금이 머물렀던 신성한 곳이라서 신물이 대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체적으로 신비스럽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외에도 1655년(효종 6)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부상록(扶桑錄)」에서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를 출발하여 오던 길에 태종대를 본 감회를 읊었다.

3. 역사를 회고하다가 태종대를 읊은 한시

역사를 회고하다가 감회에 젖어 남긴 한시는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남긴 「관동사유감효악부체(觀東史有感效樂府體)[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를 들 수 있다. 「관동사유감효악부체」 5장에는 일본 지역에 있는 백마총의 유래에 대해 고증을 해 나가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는 중에 태종대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그 가운데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猗歟兵力何壯哉]”라고 읊었다.

왜왕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공격의 진터가 절영도에 남아 있으며, 그것을 후세 사람들이 태종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신라가 왜를 진압할 만한 강한 병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전역이 늘 적의 침략을 받고 있고, 해상에서도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개탄하고 있다.

[태종대와 관련된 전설]

태종대에는 신선대, 신선 바위 또는 신선암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옛날 이곳에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또 이 신선대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사람처럼 솟아 바다를 향해 있는데, 이를 망부석이라 한다. 이와 관련된 망부석 유래담이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서 「태종대」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대의 신선 바위 위에 돌 하나가 따로 박혀 있다. 옛날 왜구에 끌려간 지아비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여인이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찬바람이 불건 땡볕이 내리쬐건 일본이 멀리서나마 바라보이는 바다 쪽을 향하여 이곳에서 줄곧 돌처럼 기다리다가 마침내 신선 바위 위에 돌덩이로 굳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돌을 망부석이라 한다.

[의의와 평가]

태종대와 관련된 고전 문학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를 찾은 것과 관련된 내용의 작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태종대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 직접 머물렀던 장소이고, 그런 인연으로 이곳의 지명도 명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일본 통신 사절단들의 작품에서는 태종대의 빼어난 절경에 대한 언급이 드러나 있는데,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한 태종대가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태종대가 우리나라 남쪽인 부산 중에서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새로서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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