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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를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55
한자 永嘉臺-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Yeongga-d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4년 - 선착장은 경부선 철도 공사 시 일본인들이 매축했고, 영가대마저 전차 선로를 만들면서 부산의 일본 거류민 단장을 지낸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진 후 흔적이 사라짐
2003년 9월 25일연표보기 - 영가대 복원
관련 장소 영가대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진 시장 뒤쪽 철로 변지도보기
관련 장소 영가대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5 자성공원 내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영가대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영가대(永嘉臺)는 1614년(광해군 6) 순찰사 권반(權盼)[1564~1631]이 선착장을 만들 때,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望樓)를 겸해 세운 8칸 누각이다. 1906년(순종 즉위) 부산역 설치 공사 때 일본인 오이케 타다스케[대지충조(大池忠助)]의 별장으로 옮겨진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2003년 자성대 공원 남쪽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영가대는 북송(北宋)의 문인 왕우칭(王禹偁)의 ‘소죽루(小竹樓)’에 비견되고,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영천의 조양각(朝陽閣)보다 뛰어난 경관으로 시인 묵객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영가대 팔경(永嘉臺八景)’이 존재할 정도였다. ‘영가대 팔경’은 1618년(광해군 10) 중양절에 이수(李璲)가 지은 칠언 절구 8수로 『부진제영(釜鎭題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곧 「영도로 돌아오는 배[影島歸帆]」, 「창포로 내려앉는 기러기[倉浦落雁]」, 「동향사(東向寺)의 새벽 종소리[蠻寺曉鐘]」, 「구봉의 저녁 봉홧불[龜峰夕燧]」, 「강선대 위를 흐르는 구름[降仙流雲]」, 「승학산의 짙은 아지랑이[勝鶴暗嵐]」, 「수정산의 석양[水晶返照]」, 「황령산의 비 갠 날 떠 있는 달빛[荒嶺霽月]」 등이다.

[영가대를 노래한 한시]

영가대를 읊은 시의 성격은 『부진제영』에 잘 드러난다. 이를 세 부분, 즉 권반의 공적 찬탄, 적정(敵情) 탐색 공간 역할, 영가대의 경관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가대를 조성한 권반의 공적을 찬탄한 시이다. 동래 부사 권부(權孚)는 「영가대」에서 “불세출의 높은 공훈은 백세토록 남았네[不世巍勳百世存].”라 하여 권반영가대를 조성한 것이 영원히 남는 공훈임을 찬양한다. 경상 좌수사 박재하(朴載河)도 “산의 높이와 해와 달의 밝음도 세상을 떠받친 공의 충절을 넘을 수 없다[山嶽之崒 不足爲高 日月之光 不足爲昭 惟公之節 撑柱宇宙].”고 하여 권반의 공적이 높은 산과 밝은 해와 달보다 뛰어남을 칭송하고 있다.

둘째, 적정 탐색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노래한 시이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이미(李瀰)[1725~?]는 “망을 보는 누대는 경보를 멀리까지 전하고/ 푸르고 깊은 바다에서 배들은 만약을 대비하네[斥候樓臺傳警遠 滄深舟楫備虞先].”라 읊어 영가대가 전함 계류와 적정 탐색에 쉬운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동래 부사를 지낸 이복(李馥)[1626~1688] 역시 “성도 외곽도 담도 없는데/ 자물쇠를 채워 적을 막는 문이 되었네[無城無郭又無垣 鎖鑰還成禦暴門].”라 하여 영가대가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 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요새임을 강조하였다.

셋째, 영가대의 빼어난 경관을 노래한 시이다. ‘영가대’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시가 이에 해당한다. 강필리(姜必履)[1713~1767]의 “바다가 높은 난간에 들어와 홀연 한 잔 술이 되었네[海入危欄忽一盃]”, 김석일(金錫一)[1694~1742]의 “여덟 창문 시원스레 트여 나그네 근심을 없애네[八牕軒豁散羈愁]”, 그리고 이명적(李明迪)의 “백 척의 높은 대가 평평한 호수를 베고 있는 듯/ 저무는 햇살 길게 늘어져 술병으로 흘러드네[高臺百尺枕平湖 斜日來澒淺淺壺]”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모두 동래 부사를 역임한 이들의 시로, 모두 영가대의 빼어난 풍광을 신선경(神仙境)에 빗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가대를 노래한 사행 문학]

영가대는 본래의 목적과 달리 통신사(通信使)·문위행(問慰行)·수신사(修信使) 등 대일(對日) 사행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곧 역대 대일 사신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해신 제당(海神祭堂)의 역할과 함께, 사행의 출발과 귀환의 지점이 된 것이다.

통신사 사행록에는 영가대가 승선(乘船) 연습의 공간이자, 해신제를 지내는 공간으로 빠짐없이 기록된다. 특히 1719년(숙종 45)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申維翰)[1681~?]의 『해유록(海游錄)』에는 영가대에서 베풀어지는 해신제의 모습이 오늘날에 그대로 재현 가능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해신에게 올리는 제문도 수록되어 당시 사행원들이 지니고 있던 바다와 해신에 대한 인식은 물론, 제주(祭主)가 자신의 존재를 밝힘과 동시에 해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제주고신(祭主告神), 해신의 덕을 찬양하는 송신(頌神), 제의 목적 고지와 해신의 가호 기원, 흠향 및 축원 등 제문의 구성과 내용도 살필 수 있다.

통신사를 매개로 영가대를 읊은 시도 환송을 나온 이들의 시와 사행원의 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동래 부사를 지낸 윤필병(尹弼秉)[1730~1810]은 “두우성은 곧장 사행길을 범하였고/ 고물과 이물은 길게 물결 가르고 나갈 마음을 머금었네[斗牛直犯乘槎路 艫舳長含破浪深]”라고 하여 사행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이묵(李默)은 “옥을 잡고 선 오랑캐 추장의 옷 선명도 하여라[蠻酋摯玉卉衣明]”라고 하여 사행을 인도하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모습을 그려 장도(壯途)에 오르는 사행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사행원의 시는 윤순지(尹順之)[1591~1666]가 “지세는 천연의 요새인데 경치는 오히려 아름답네[地成天塹景還嘉]”라고 하여 그 풍광을 칭송하는가 하면,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귀국길에서 “만 리 긴 바람 그치지 않아/ 돛대 날려 곧장 영가대에 이르렀으면[萬里長風吹不盡 揚帆直到永嘉臺]”이라 하여 귀환 지점으로서 영가대를 부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643년(인조 21) 통신사 종사관 신유(申濡)[1610~1665]가 읊은 「영가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소슬출운단(高臺蕭瑟出雲端)[높은 대가 쓸쓸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피수천심석색반(陂水千尋石色蟠)[언덕 아래 천 길 물엔 돌빛이 어리었네]

가함온여장대학(舸艦穩如藏大壑)[배들은 안온하게 큰 구렁에 숨겨진 듯]

해중종일자파란(海中終日自波瀾)[바다가 온종일 물결로 흔들려도].

[의의와 평가]

유물이나 유적지를 찾아가 옛 선인들이 남긴 작품과 대조하며 감상하는 것은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지 않는 유물이나 유적은 결국 옛 기록과 선인들의 작품 속에서 생명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영가대를 노래한 고전 문학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 영가대의 재구(再構)는 물론 새로운 의미의 역사성과 공간성의 확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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