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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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息波樓-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Sikpa-r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식파루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식파루(息波樓)는 동래부 객사인 봉래관의 남쪽에서 바깥 대문 역할을 하던 2층 6칸으로 된 누각이다. 1629년(인조 7)에 부사 유여각(柳汝恪)[1588~?]이 세웠고, 1703년(숙종 29)에 부사 이야(李壄)[1648~1719]가 중수(重修)하였다. 1735년(영조 11)에는 부사 최명상(崔命相)이 다시 중수하였다. 1930년 무렵 현재의 동래 시장이 동래 공설 시장으로 될 때 유실된 것으로만 추정될 뿐 정확한 훼실(毁失) 시기를 파악할 수 없다.
[식파루를 노래한 한시]
식파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 작품으로는 이원진(李元鎭)[1594~?]과 이서우(李瑞雨)[1633~1709]의 시만이 확인된다. 이원진의 작품은 동래 부사로 재직했던 1644년(인조 22)에서 1645년 사이에, 이서우의 작품은 동래에 경차관으로 왔다가 이듬해 동래 부사가 되었던 1678년(숙종 4)에서 1679년 사이에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원진의 작품을 보겠다.
의일고추감개다(依釰高秋感慨多)[검에 기대어 높은 가을 하늘에 감개함이 많으니]
석년분침억용사(昔年氛祲憶龍蛇)[예전 재앙이 용두사미였음을 떠올려서라]
하당갱작부산죽(何當更斫浮山竹)[어찌해야 다시 부산(浮山)의 대를 베어다가]
취식동명만만파(吹息東溟萬萬波)[동쪽 바다 큰 파도 피리 불어 멈출까나].
이원진은 이 시에서 임진왜란의 상흔을 떠올리며 감개한다. 그리고는 파도를 쉬게 하는 뜻의 식파루에서 ‘식(息)’과 ‘파(波)’라는 글자와 만 길이나 되는 파도를 멈추게 하는 피리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국조 고사를 결합시킨다. 그래서 곧 이 피리를 구해 불어야 동쪽 왜인의 근심을 멈출 수 있겠다고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그 피리가 자라는 곳은 부산(浮山)인데, 이 또한 부산(釜山)과 동음이의(同音異義)[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의 언어유희다. 다음은 이원진이 지은 「남루야흥(南樓夜興)」이다.
월출상산상(月出上山上)[달은 떠 산 위로 오르고]
풍래동해동(風來東海東)[바람은 동해 동쪽에서 부는구나]
수지금야흥(誰知今夜興)[누가 알겠는가? 오늘 밤 깨어난 것이]
각여고인동(却與故人同)[도리어 옛 사람과 같다는 것을].
이 시는 이원진이 식파루에서 밤에 깨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동쪽의 왜인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옛사람처럼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심사를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사를 토로하였다. 다음은 이서우가 지은 「식파대(息波臺)」이다.
연월창창고첩추(烟月蒼蒼古堞秋)[으스름달 푸르스름한 옛 성가퀴 가을에]
사군고의식파루(使君孤倚息波樓)[지방관 외로이 식파루에 기대노라]
일성하처촌동적(一聲何處村童笛)[어디선가 시골 아이 부는 젓대 소리 한 가닥]
견동신라불진수(牽動新羅不盡愁)[신라를 회상하니 시름 가없어라].
이서우 역시 가을날 쓸쓸히 식파루에 올랐다. 가을걷이와 추석으로 모두들 즐거운 한때를 보낼 때 작자의 외로움은 깊어진다. 그래서 식파루에 올랐건만,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한 가닥만 있을 뿐이다. 그 소리로 인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사의 시름이 더 깊어질 법도 하건만, 이서우는 여기서 불현듯 신라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개인적 시름을 인간사에서 국가의 흥망성쇠로 그 생각의 폭을 확장하니, 가을날 시름은 그칠 줄 모르게 된다.
[의의와 평가]
식파루를 노래한 한시 작품은 식파루 자체의 모습이나 풍경을 읊기 보다는 식파루에서 거처하는 중에 느끼는 감회를 그리고 있다. 작품 자체도 소량에 불과하다. 향후 부산의 식파루에 관련한 좀 더 많은 자료의 발굴이 요구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