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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관을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50
한자 釜山館-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Busan-gwa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량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2년연표보기 - 「동래잡영 이십수(東萊雜詠二十首)」 중에서 여섯 번째 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차부산관(次釜山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7년 - 제목은 미상
관련 장소 부산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량동 일대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부산관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부산관(釜山館)은 조선 시대에 왜인(倭人)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이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동시에 이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숙소로 부산진의 초량촌(草梁村)에 두었던 객사를 말한다. 1407년(태종 7)에 제포(薺浦)의 왜관과 함께 처음 설치하였다가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과 임진왜란을 전후로 폐지하였다. 이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두모포(豆毛浦)에 다시 설치하였고, 1678년(숙종 4)에는 초량으로 옮겨 1872년(고종 9)에서야 폐지되었다.

[부산관을 노래한 한시]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시는 『동래부지(東萊府誌)』 「부산관조(釜山館條)」에 실려 있어 부산관의 현판에 걸려 있던 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1. 이민구의 「동래잡영 이십수(東萊雜詠二十首)」 중에서 여섯 번째 수

원문서색접봉래(轅門曙色接蓬萊)[군영에서 새벽에 봉래를 접하고]

뇌고명가차제최(攂鼓鳴笳次第催)[북 피리 치고 불며 차례로 재촉하네]

일세건곤만고안(一洗乾坤萬古眼)[한 번 천지를 씻으니 만고에 볼만하고]

독경호해십년배(獨傾湖海十年杯)[홀로 호수와 바다 기울이니 십년만의 술잔이라]

층파일난어룡변(層波日暖魚龍變)[높은 파도 따뜻한 날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함이요]

교목천저관학회(喬木天低鸛鶴廻)[아득한 나무 하늘 아래로는 황새와 학이 내려앉도다]

불분주남류체지(不分周南留滯地)[주남인지 불분명하여 머무르는 곳에서]

위견춘흥강등대(爲牽春興強登臺)[춘흥에 끌려 부러 누대에 오르노라].

이민구는 1622년(광해군 14) 당시에는 선위사(宣慰使)의 신분이었다. 군영에서 새벽을 맞아 북과 피리를 치는 모습에서 선위사의 분주한 일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 온 뒤 천지가 씻겨간 모습은 만고에 볼만한 아름다운 광경이다.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는 듯 파도는 멀리서 일렁이고, 가까이에는 황새와 학이 커다란 나무 아래로 내려앉는다. 이민구는 이러한 부산관의 광경에서 춘흥에 이끌려 봄을 만끽하고자 누대에 오른다. 부산관에서 바라보는 정경과 그곳에서 봄을 맞이하는 이민구의 마음을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다.

2. 곽지흠의 시

취각고성월색원(吹角孤城月色圓)[뿔피리 외딴 성에 달은 휘영청]

장연여수수여천(瘴烟如水水如天)[해무는 눅눅한데 물은 하늘빛]

고원천리미귀객(故園千里未歸客)[고향 천리라 돌아가지 못한 나그네]

의내일성하처선(疑乃一聲何處船)[아마도 한 소리에 어디선가 배를 타리라].

접위관(接慰官)으로 부산에 왔었던 곽지흠(郭之欽)[1601~?]의 시도 『동래부지』의 「부산관조」에 실려 있어 부산관을 노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달 밝은 밤에 군영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라 해무는 물을 머금은 듯 눅눅하기만 하고, 물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나그네는 곧 곽지흠의 심사다. 그 피리 소리에 어디에서라도 배를 훌쩍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읊조렸다.

3. 신유의 「차부산관(次釜山舘)」

기미번공서색분(旗尾翻空曙色分)[깃발이 하늘에 펄럭이고 동이 터 오는데]

사초최발인전군(使軺催發引前軍)[사절이 전군에게 출발을 재촉하네]

성요사영래산우(城腰乍暎萊山雨)[성 허리엔 얼핏 동래산 비가 보이더니]

마수평림부포운(馬首平臨釜浦雲)[말 머리로 넙죽 부산포의 구름이 깔리었네]

개주불방변장읍(介冑不妨邊將揖)[갑옷 차림에 변장은 예를 해도 무방하고]

소가이견도이문(簫笳已遣島夷聞)[단소·피리 소리는 왜놈에게 들려주었으리]

왕령도처신명호(王靈到處神明護)[왕령이 이르는 곳마다 신명이 보호하리니]

오배행간제해분(鼇背行看霽海氛)[거북등에 구름바다가 활짝 개이리로다].

죽당(竹堂) 신유(申濡)[1610~1665]는 1610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부산관에서 머물다 배를 타고 나가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이른 아침 출발 준비로 분주한데 동래산에는 비가 내리고 부산포엔 구름이 자욱하다. 단소와 피리 소리를 듣고 왜놈은 물러갔을 것이며, 혹여나 파도는 잠잠해질 것이라 하였다. 거북등[鼇背]은, 동해(東海)에 다섯 산(山)이 있는데 조수(潮水)에 흔들리므로 상제(上帝)가 큰 거북 다섯으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이게 하니 오산이 비로소 든든히 솟았다는 고사(故事)를 말한다.

[의의와 평가]

부산관은 군영이 있던 객사라 문인들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몇 작품들에서 부산관의 정경과 그곳에서 나그네로 묵고 있는 진솔한 심정,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출정을 앞둔 부산관의 모습 등이 나타나 있다. 부산관의 옛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선인의 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동래부지』 「부산관조」에 실려 있는 작품에서는 다소 불분명한 곳이 있다.

백사(白沙) 윤훤(尹喧)[1573~1627]과 구원(九畹) 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두 시는 분명 「부산관조」에 실려 있음에도 작품 말미에 공히 “인빈헌래주잡영(寅賓軒萊州雜永)”이란 기록이 있어 부산관을 노래한 작품인지 인빈헌을 노래한 작품인지 판정하기 어렵다. 또한 이정제(李廷濟)[1670~1737]와 이정신(李正臣)[1660~1727]의 작품 역시 「부산관조」에 실려 있으나, 역시나 작품 말미에 공히 “정원루래주팔영(靖遠樓萊州八咏)”이란 기록이 있어 부산관을 노래한 작품인지 정원루를 노래한 작품인지 판정하기 어렵다. 남아 있는 문헌 자료의 정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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