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9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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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末湫- |
영어의미역 | Seokmalchu Village |
이칭/별칭 | 석말치,성말치,성돌추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 석말추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경업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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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10년 - 경상남도 동래부 사중면 영선리에서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44년 -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에서 부산부 사중면 석견정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47년 - 부산부 사중면 석견정에서 부산부 사중면 남항동 1·2·3가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49년 - 부산부 사중면 남항동 1·2·3가에서 부산시 사중면 남항동 1·2·3가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51년 - 부산시 사중면 남항동 1·2·3가에서 부산시 영도출장소 남항동 1·2·3가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57년 - 부산시 영도출장소 남항동 1·2·3가에서 부산시 영도구 남항동 1·2·3가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59년 - 해안가 매립으로 석말추 마을 사라짐 |
자연 마을 | 석말추 마을 -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 석말추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석말추(石末楸)는 바닷가에 있는 큰 돌이 밀물 때는 보이지 않으나 썰물 때 돌 끝[石末]이 조금 보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지역민들은 석말치·성말치 또는 성돌추로 불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석말추 마을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기록상에서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남항동 옛 방파재길 서쪽이 매립되기 전에는 자갈이 많은 해안으로 ‘자갈 만댕이’라고 불렀다가 석말추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1896년(고종 33) 영도 전체가 경상남도 동래부 사중면 영선리로 최초의 공식 동명을 갖게 되었을 때 석말추를 영계(瀛溪)[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로 바꾸었다고도 전하지만, 옥성학교[1908년(순종 2) 개교하였으며 현재는 영도초등학교가 됨] 설립자인 김옥성이 1902년(고종 39) 통영에서 석말추에 정착하였을 당시에는 뚜렷한 동명이나 행정 구역 명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에 석말추 마을이 1900년대 초반 뚜렷한 마을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가 되었다. 1925년 영선리가 영선정(瀛仙町)으로 개칭되고, 1944년에는 영선정이 6개 정(町)으로 분할되며 석견정(汐見町)이 되었다고 한다. 광복 당시 석말추 마을은 몇몇 가옥이 있고 주변 농경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하였으며, 남쪽 바다는 청어 어장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47년 일본식 동명을 개칭하며 남항동(南港洞)이 되었으며, 1949년 부산시로 개칭하였고, 1951년에는 영도출장소 남항동에 속하게 되며, 1957년에는 영도구 남항동에 속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을 거치며 석말추 마을은 옛 모습이 사라지며 판잣집과 골목길이 즐비한 인구 밀집 지역이 되었으나, 1959년 태풍 사라호로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이 모두 쓸려 가거나 뜯겨, 옛 방파제 앞을 매립하고 해안가에 높은 방파제를 구축하고 매립지에 새로운 주택지를 조성하고 길을 정비하였다. 이에 석말추 마을은 일부 주민들에게 이름만 전하는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석말추 마을은 본래 영도의 남서쪽 자갈이 많은 해안이었으나, 현재는 매립된 평지로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현황]
석말추 마을은 1959년 태풍 사라호 이후 피해 지역이 재정비되고, 1968년부터 1977년까지 해수면 매립 공사가 이루어져 현재는 마을의 흔적뿐 아니라 마을이 있던 위치조차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