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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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里-九七里- |
영어의미역 | Sinri Village[Guchil-ri] |
이칭/별칭 | 새마을,동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신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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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895년 - 기장군 남면 구칠동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 |
변천 시기/일시 | 197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구칠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구칠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자연 마을 | 신리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신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신리(新里) 마을[구칠리]이라고 부른다. 상신리(上新里)와 하신리(下新里)로 나누어져 있다. 한편 동풍을 새파람이라 부르듯이 ‘새’는 동쪽을 뜻하므로, 신리는 동쪽에 있는 마을, 즉 동촌(東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마을이라고도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마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청동기 시대 이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차성가(車城歌)」에 “일장 호접(一場胡蝶) 깨닌(인) 잠니(이) 구칠(舊柒)이 한가하다”라고 하여 구칠이란 지명이 나온다. 1904년(고종 41) 간행된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에 의하면, 당시 기장군 남면 구칠동(九七洞)에는 34호가 살고 있었다. 집은 대개 초가 2~4칸이다. 정씨(鄭氏)[25호]가 가장 많이 살고, 다음이 김씨[5호] 순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기장현 상서면 구칠리로 나타나며,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이 되었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이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 의하면, 당시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에는 동래 정씨 20가구가 사는 동성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에 병합되었다. 1986년 양산군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기장군의 복군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신리 마을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환경]
신리 마을 북쪽으로 곽암못이 있고, 남쪽으로 칼치재가 있다. 동쪽에는 일광산이 있다.
[현황]
신리 마을은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11통 지역 일대에 있는 자연 마을로, 구칠 마을 입구에서 갈치 고개를 향해 지방도를 따라 계속 가면 상신리(上新里) 마을 표석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신리 마을 회관이 있다. 동래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구칠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철마제일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가 있는 주변 마을이 하신리이다. 아랫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상신리와 하신리 사이를 신리의 온당골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고인돌 2기가 있다. 지상에는 상석 윗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두 고인돌은 동서 방향으로 약 2.5m 정도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다. 상석은 주축(主軸) 방향이 N20도w이고, 현재 노출되어 있는 크기는 서쪽의 것이 1.8×1.4×0.5이고, 동쪽의 것이 1.4×1.2×0.3이다. 서쪽 고인돌 상석 윗부분에는 성혈(性穴) 2개가 있다. 고인돌이 자리 잡은 곳은 현재 논으로 경작하고 있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을의 주업은 논농사와 밭농사이며, 콩과 열무, 뽕나무 열매인 오디[桑實]를 반송 시장·동래 시장에 팔아 수입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