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7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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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學院 |
영어의미역 | Institute for Traditional Korean Cultural Studies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1946년 부산 지역에서 설립된 한글 교육 기관.
[설립 목적]
일제 강점기 국어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 중심의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한글을 아는 이도 적어져 민족정신이 흐려졌고, 자주 독립 사상을 좀 들게 하였다. 이를 우려한 선각자들은 일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글과 말의 계도와 보급에 진력하였으며, 광복을 맞아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한글의 지도와 보급은 부산이 활발하였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어 보급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가 국학원(國學院)이다.
[변천]
국학원은 1946년 경상남도 통영 출신의 박병환이 설립하였으며, 6·25 전쟁 이전까지는 운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7년에 동래고등학교 출신으로 한글 보급에 힘을 쏟은 허웅(許雄)이 부산대학교 국문학과에 교수로 들어오고, 허웅의 동기인 나진석이 합세하자 1948년 부산 국어학계는 크게 학풍이 일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돕고자 나선 단체가 국학원이다. 이 학원의 간사로는 백남철, 조용만, 오재희 등이었는데, 사무는 주로 백남철이, 이론은 조용만이 맡았다. 허웅은 그들의 청견을 받아 국학원을 중심으로 국어 연구회를 조직, 연구부장에 취임하여 국어의 보급을 꾀하였다.
1949년 봄에 첫 발표회를 가졌는데, 정병욱이 ‘꽃과 시조’를, 박지홍이 ‘한·일 두 국어의 비교~생식기 관계어에서~’를 발표했고, 이 해 겨울 서울에서 이병기, 김윤경을 초빙하여 중등학교 국어 교사 재교육을 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방 이후 국어 보급에 힘쓴 부산의 대표적인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