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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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火葬墓 |
영어의미역 | Tomb for Cremation |
이칭/별칭 | 화장 무덤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시대의 화장묘.
[개설]
화장묘는 유체(遺體)[죽은 사람의 시신]를 불에 태운 후 남은 유골을 용기에 담아 장례를 치름으로써 생긴 무덤이다. 이를 ‘화장 무덤’이라고도 한다. 유체를 태워 처리하는 행위는 전쟁 또는 전염병 등에 의해 일순간에 많은 인명이 죽었을 때, 또는 유체 이동의 경비 절감과 전염병 예방을 위하여 위생적인 유체 처리, 그리고 특정의 종교적 이유로 발생한다. 삼국 통일 전쟁의 와중에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살상된 유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화장을 했거나 남은 유해를 땅속에 묻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사례가 없다.
문무왕(文武王)의 화장이 계기가 되어 통일 신라에는 화장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화장묘 조영도 많아졌을 것이다. 신라에서 가장 빠른 화장묘는 7세기 전반의 동천동 화장묘이고, 8세기 이후가 되면 왕경과 지방에도 화장묘가 조성된다. 통일 신라 시대의 화장묘는 뼈를 담은 장골기(藏骨器)와 장골기를 보호하는 별도의 시설물이 마련된 이중형, 그리고 원형[또는 장방형]의 수혈을 파고 그 안에 뼈를 담은 용기를 외용기나 다른 외피 시설 없이 매장하거나 또는 별도의 장골기 없이 석관 내부[또는 토광 내부]에 장골한 단일형으로 나뉜다.
[분포와 형태]
부산 지역에는 화장묘의 조사가 거의 전무한데, 연산동 고분군과 기장군 대라리 유적·명례리 유적에서 여러 기가 확인되었다. 연산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화장묘는 5~6세기대의 분묘가 조영된 언덕 끝자락에 위치한다. 화장묘는 6세기 전반의 토광 위에 조영되었는데, 원형에 가까운 수혈을 파고 그 안에 뚜껑이 덮인 병[有蓋甁]을 장골기로 매장하였다. 기장군 대라리의 화장묘는 제사 유구가 있는 Ⅳ지구의 언덕 남쪽 비탈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안에 뚜껑합[有蓋盒]을 안치한 구조로서 여러 기가 확인되었다. 기장군 명례리 하장안 유적의 언덕 비탈에서 확인된 화장묘는 1기이다.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안에 뚜껑합을 안치하였다.
부산 지역에서 조사된 화장묘는 뚜껑병 또는 뚜껑합에 유골을 담아 지하에 매장한 단일형의 간단한 구조로서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에 조영된 화장묘의 모습을 나타낸다. 불교 수용 이후에 새로운 장법의 하나로 시행된 화장은 불교적 생사관에 입각한 장례의 간소화로 이어져 전통적 매장 관념에 혁신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