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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801
한자 鄕校
영어의미역 Neo-Confucian School
이칭/별칭 교궁,재궁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형

[정의]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 기관.

[개설]

향교는 고려 전기부터 지방에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워지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 지방마다 설립된 관립(官立) 교육 기관이다. 이를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공립 중·고등학교와 비슷하다. 향교는 학생들의 교육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부산 지역 향교의 연원]

고려 전기에 동래현과 기장현, 동평현은 울주(蔚州)[현재의 울산], 양주(梁州)[현재의 양산]의 속현(屬縣)으로서 향교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 정씨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손자인 정항(鄭沆)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숙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1등 공신 왕국모의 사위가 된 12세기 초에, 동래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었다고 본다. 이때에도 동래는 ‘현(縣)’ 단위의 낮은 행정 구역이었고, 고려 후기에는 잦은 왜구의 침입 등으로 혼란하였으므로 향교는 세워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산에 향교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부산에 남아 있는 향교는 동래 향교기장 향교이다. 동래 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조선의 교육 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기장 향교는 1440년(세종 22)에 세워졌다.

[입학 자격과 교과 과정]

향교의 입학 자격은 16세 이상의 양반 자제 또는 향리를 원칙으로 하였다. 향교의 구성원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도호부(都護府) 이상의 지역에는 종 6품 이상의 교수를, 군(郡) 이하에는 7품 이하의 훈도를 각각 파견하였다. 유생 정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기장과 같은 현에는 30명이었다.

향교의 교과 과정은 『소학(小學)』을 비롯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주가 되었고, 『성리대전(性理大典)』, 『근사록(近思錄)』 등의 주자학과 역사책 등이 추가되었다. 향교의 운영은 나라에서 주는 학전(學田)과 노비, 지방 유림들의 기부금 등을 활용하였다.

[동래 향교]

조선 초기 동래 읍성의 동문 밖 2리(里)[거리의 단위로 1리는 0.45㎞ 안팎] 가량 떨어진 곳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05년(선조 38) 부사 홍준(洪遵)[1557~1616]이 다시 세웠다. 1704년(숙종 30)을 비롯하여 세 차례 옮겨진 뒤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547년 동래 도호부로 승격된 후 동래 향교의 구성원은 종 6품의 교수 1명과 정원 70명의 유생이 있었다.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교수가 없어진 대신에 도유사(都有司) 1명, 장의(掌議) 1명, 재임(齋任) 2명 등의 임원을 두었다. 배치는 전형적인 일직선 배치법에서 벗어나 지형, 지세와 공간의 독립적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 옆으로 비스듬하게 배치하였다. 주요 건물은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서재, 반화루, 외대문, 내삼문, 협문 등이 있다. 동래 향교는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과 이듬해 을미개혁으로 과거 제도는 폐지되고, 신학제(新學制)가 제정되어 향교에서의 교육을 대신할 새로운 학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동래 향교 유림들은 1908년 5월 28일 사립 명륜학교(明倫學校)를 개교하여 신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5년 이후에 폐교된 사립 명륜학교를 이을 동래 향교 유림들의 교육 기관은 1974년 1월 5일 동인고등학교 설립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청년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기장 향교]

1440년(세종 22) 처음 세워진 뒤 1617년(광해군 9) 유림들에 의해 현의 북쪽 3리 되는 곳으로 옮겨 지금 남아 있는 경내 대부분의 건물들을 지었고, 1758년(영조 34) 다시 현의 동쪽 5리 되는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기장 향교의 구성원은 종 9품의 훈도 1명과 유생 30명이었다.

건물의 배치 형식은 남북 직선을 축으로 명륜당을 앞쪽에, 대성전을 뒤쪽에 두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현재 건물은 대성전을 비롯하여 내삼문 역할을 하는 신삼문이 있으나, 동무·서무는 없고, 교육 공간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 출입 문루인 풍화루(風化樓)가 있으며, 그 앞쪽에는 바깥 대문인 세심문(洗心門)이 있다. 대개는 출입 문루가 대문의 역할을 함께하는 것과 달리 바깥 대문을 따로 두는 특징이 있다. 1996년 5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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