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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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判洛 |
영어음역 | Ha Panrak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호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고위 경찰 관료를 지낸 친일파.
[개설]
하판락(河判洛)은 일제 경찰로 일하며 사천과 부산의 경찰서에서 근무하였는데, 경상남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다. 일제 강점기 말 신사 참배 강요에 앞장서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을 대거 붙잡아 고문하였고, 1943년 친우회 회원인 여경수(呂敬守)를 잡아들여 숨지게 하고 가담자들을 불구로 만들어 ‘고문귀’, ‘고문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활동 사항]
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의 유지 가문에서 태어났다. 1934년 2월 순사 채용 시험에 합격한 후 경상남도 사천경찰서 순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사천경찰서 삼천포주재소 순사로 전출된 후, 1937년 3월에는 부산수상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1939년에는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외사계 순사로 옮겼고, 그해 12월 도경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41년에는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순사 부장으로 승진해 외사계 주임이 되었다.
1943년 3월 부산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 반대를 목적으로 ‘친우회’라는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친우회에서는 일제의 군사 시설과 군수 공장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추진하고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전단을 제작해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판락은 친우회에서 활동하던 이광우(李光雨), 여경수 등을 체포해 고문하였으며, 이 일로 여경수는 순국하였다.
광복 당시에는 경부보 직급에 있었으며, 미 군정의 비호 아래 1946년 4월 경상남도 경무보 회계 계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옮겨 퇴직하였다. 경찰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처리에도 관여하였다.
1949년 서울에서 간행된 『반민자 죄상기』에 “주사기로 착혈하던 고문귀 하판락”은 “조선인 형사로서 가장 악질적인 친일귀였다”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친일 경찰로 이름이 높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 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그해 8월 반민 특위 해체로 석방되었다. 1956년 고향인 경상남도 진양 제1선거구에서 경상남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금융업과 목재업에 종사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하판락은 친일 인물이 광복 후 남한에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렸다는 속설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의 친일 행각을 다룬 향토 역사서인 진양군 『명석면사』가 하판락 가문의 반발로 다시 쓰인 일이 있으며, 이광우의 아들이 하판락의 고문으로 평생 불구로 살아온 아버지의 독립 유공자 선정을 위한 증언을 받으려고 하판락을 찾아갔다가 부유하고 건강한 모습에 씁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 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하였을 때 명단에 든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2000년 1월 17일 『대한 매일』에 자신이 일제 경찰 간부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용서를 비는 반성 기사를 올렸다. 2003년 9월 11일 92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진주시 진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