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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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漂流民 |
영어의미역 | Drifters |
이칭/별칭 | 표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시대 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표착한 일본인 또는 일본으로 표류한 조선인.
[개설]
동력을 사용하는 근대의 선박이 나오기 전 상업, 무역 등의 이유로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은 해류나 갑작스런 기후 변화 등으로 표류·표착하는 일이 많았다. 표류민(漂流民)은 전근대 어느 시대나 발생하는 문제였으나, 표류민 송환이 하나의 외교 시스템으로 정비되는 시기는 조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 왜구의 위협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조선에 나타나는 일본인을 표류·표착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표류민은 바다를 공유하는 중국과 조선,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외교 사절이나 상인의 선박이 조선에 표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전기에는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유구(琉球)에서도 표류민 송환이 많았다. 이 때문에 표착이 자주 일어나는 곳에는 통역관을 배치하여 외국인의 본국 송환을 도왔다.
표류민이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대부분 어민이나 상민이었기 때문에 조선 민중의 생활의 단면을 찾는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외국에 표착하여 외국인과 외국 문물을 접하기 때문에 민중의 시선에서 국제 교류의 의의를 찾을 수도 있다. 게다가 표류민의 송환 체제가 시기에 따라 변화하므로 조선의 외교사 고찰에도 의의가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일본으로 열린 창구가 부산밖에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표류민이 모두 부산으로 모였다.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의 출신지는 경상도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다음이 전라도였다. 근대 개항 이후에는 전라도, 경상도 순이었다. 표류의 원인은 대부분 항해술과 조선술의 한계, 어업·운송·상업을 위한 출항, 해류 및 조류와 바람 등 기후 여건이었다.
[송환 절차]
1.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 표류민
조선인이 일본에 표착하였을 때에는 일본 표착지에서 조선인 표류민 모두를 나가사키[長崎]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보냈고, 쓰시마 섬 관리를 사절로 삼아 표류민을 데리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게 하였다. 표류민을 나가사키로 보낸 이유는 일본 막부(幕府)의 직할 도시로 외국 문화가 들어오는 창구였기 때문에 모든 외국인과 외국 선박은 나가사키를 통해 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가사키에서 쓰시마 섬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기독교도인지의 여부도 심문하였다. 쓰시마 섬에 조선인이 도착하면 표인 영래 차왜(漂人領來差倭)가 이들을 이끌고 왜관에 왔다. 표인 영래 차왜가 오면 여타의 차왜와 마찬가지로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의 후한 대접을 받고 예단을 받았다. 표류민의 배가 파손되어 일본인의 배를 타고 온 경우에는 사절단에게 주는 정해진 식량과 선물 외에 일본 뱃사공 한 명당 쌀 한 섬씩을 더 주었다.
이런 특혜를 악용하여 표류민의 배가 파손되지 않았더라도 일본 선박에 태우고 오는 폐단이 많이 나타나자,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오는 사송선(使送船)이나 무역선[歲遣船], 조선 사절이 쓰시마 섬에 가면서 이용한 그 배를 타고 오도록 하였다. 이것을 표민 순부(漂民順付)라고 한다. 조선인도 일본에 표류하면 일본에서 주는 의복·식량 등의 생필품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고의로 표류하는 고표(故漂)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표착한 조선의 표류민은 돌아와서 일본 표착지의 모습이나 현황을 알리기도 하였고, 반대로 일본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조선의 모습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일본 사츠마[현 가고시마]에 표착한 조선인은 일본인 통역관과 대화하면서 자신들이 본 부산 왜관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표민 대화(漂民對話)』라는 표류 문답기에 전한다. “왜관에 매일 들어가 떡과 엿을 파는 아이들 말을 들으니 동관(東館)·서관(西館)이라고 하여 두 군데에 집이 있고, 서관은 송사들이 유숙하는 행랑(行廊)만 있기 때문에 가호 수가 많지 않고 동관은 집이 다수 있다고 한다”라며 표류민이 왜관을 출입하는 조선인 아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와 같은 표류민의 담화는 당시 부산에 있던 초량 왜관 안팎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 조선에 표착한 일본인 표류민
일본인이 조선에 표착한 경우, 조선에서도 일본과 똑같이 후한 대접을 하였다. 부산 지역에서 일본 표류민이 많이 도착한 지역 중 한 곳이 기장이었다. 기장은 표류한 일본 선박이 나타나지 않는 달이 없을 정도로 표착이 잦았다. 이들은 모두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했으므로, 기장에서 동래로 이송될 때까지 표류민의 체류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였다.
또한 일본 선박이 표류하면 상급 기관에 기본적으로 다섯 차례나 보고해야 하였다. 보고를 위한 인력도 기장에서 담당해야 했으며, 보고 인력이 타고 갈 교통수단이나 교통비도 모두 기장에서 담당하였기 때문에 일본인 표류 처리는 기장 지역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일본인이 표착한 표착지에서는 그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넉넉하게 지급하고, 동래부-왜관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부산은 조선 연안에 표착한 일본인이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모이는 곳이었고,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이 맨 처음 도착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에는 일본인이 왜관으로 이동하기 전에 머물렀던 표민 수수소(漂民授受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곧 조선 시대 표류민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공간으로 기능한 곳이 부산이었다. 또한 표류민은 조선 시대 통신사(通信使)나 문위행(問慰行)이 수행하는 공식적인 국가 간의 외교가 아닌 민간 차원의 국제 교류의 양상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