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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 의용 경찰 위령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585
한자 殉職義勇警察慰靈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The Policeman Who Died on Dut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철마로 485[와여리 544-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위령비
관련인물 이경섭|오재오|차규철|김성수|김수상|송만조|송갑조|신유택|정경은
크기 75㎝[가로]|55㎝[세로]|10㎝[아래쪽 두께]
소유자 철마면사무소
관리자 철마면사무소
건립 시기/일시 1985년 1월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2005년 12월 15일 - 실로암 공원에서 철마면사무소로 이전
현 소재지 철마면사무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철마로 485[와여리 544-1]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 있는 순직 의용 경찰들의 위령비.

[개설]

1952년 9월 2일 오후 8시경에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에서 공비가 출현하였다는 당시 이곡리 이장 이철재의 전화 연락을 받고 동래경찰서 철마지서 의용 경찰 1개 분대원 9명은 철마지서를 출발하여 이곡리로 향하였다. 때마침 철마면 연구리 보림 정미소 주인 정기용의 아들 정호길(鄭浩吉)[당시 12세]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철마면 와여리 오재춘이 경영하는 술도가에서 탁주를 사서 주전자에 담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옛 철마면 창고 근처에서 이곡리로 출동 중인 전투 경찰 대원을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의용 경찰보다 약 20m 정도 앞서 갔다.

나암봉을 조금 지나서 기와 공장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나암봉 양쪽 기슭에 미리 대기 중이던 공비들이 뒤따라오던 의용 경찰들을 습격하여 순경 이경섭을 비롯하여 철마면 출신 의용 경찰 6명이 전사하였다. 한편 정호길은 총소리에 정신을 잃고 기와 공장 옆 무논에 엎드렸는데, 그때 공비들이 사격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 한 방이 오른쪽 머리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정호길은 논두렁 밑으로 기어 겨우 집에 도착하여 된장으로 총상을 치료하였다. 총상을 입은 정호길은 아버지를 따라 곧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고, 생존한 사람들도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았다.

[건립 경위]

1984년 12월 철마초등학교 강당에서 이재우 국회 의원이 귀향 보고를 할 때 당시 살아남은 동료 의용 경찰 오재오가 “전사한 동료들의 위령비라도 세워 주어야만 살아남은 자들이 편히 잠들 수 있겠다”고 건의하여 순직 의용 경찰 위령비(殉職義勇警察慰靈碑)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차규철 면장이 비문을 짓고 실로암 공원에서 위령비를 만들었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20여 년간 그대로 두었다가 2005년 12월 15일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위치]

순직 의용 경찰 위령비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544-1번지 철마면사무소 내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크기는 가로 75㎝, 세로 55㎝, 두께 10㎝[아래쪽]이다. 옆으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므로 비석의 아래쪽이 가장 두껍다. 비석의 양쪽 끝을 돌로 받쳐 놓았다. 정면은 가로가 긴 직사각형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순직 의용경찰 위령비’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어찌 잊으랴 1952년 9월 2일/ 붉은 무리에 한 치의 땅도/ 더럽히지 않으려다/ 이곳에 젊음을 산화한/ 칠(七) 위의 호국 영령을 달래며/ 그 넋을 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순직자 순경 이경섭, 의용 경찰 김성수·김수상·송만조·송갑조·신유택·정경은.”

1985년 1월 철마면민 일동

[현황]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철마면사무소 내에 위치하여 1950년대 상황을 잘 알릴 수 있는 표지물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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