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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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左川場-三一運動 |
영어의미역 |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t Jwacheon Marketplace |
이칭/별칭 | 정관면 3·1 운동,장안면 3·1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 5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1919년 4월 9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좌천 장터 3·1 운동은 1919년 4월 9일 좌천 장날을 기해 정관면 청년들 주도하에 좌천 장터와 좌천 주재소 등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속에 기장면에서도 4월 5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정관면에도 이 소식이 전해져 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경과]
좌천 장터 3·1 운동은 정관면의 오해환(吳海煥)이 기장면 김수룡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구해 와, 오진환과 김종복에게 전하고 함께 동지를 규합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은 신두성(辛斗星)·김윤희(金允熙)·정지모(鄭智謨)·박일봉(朴一鳳) 등과 함께 김종복의 사랑방에서 비밀리에 시위를 계획하고 거사 일을 좌천 장날인 4월 9일로 정하였다.
4월 9일 이른 아침부터 각처에서 많은 장꾼이 모였다. 신두성·김윤희 등 5명이 장시 중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500~600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호응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장시를 누비면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시위가 더욱 고조되고 시위 군중이 점점 늘어나자 일본 군경은 야만적인 무력 탄압과 발포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많은 시위 군중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힌 주도자를 석방시키기 위해 좌천 주재소로 가서 일본 군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과정을 통해 체포된 주도 인물들을 석방시켰다. 군중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면서까지 만세를 불렀다.
[결과]
시위가 끝난 뒤 일본 군경에 의해 결국 주도자들이 체포되어 김윤희·정지모·신두성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윤희·정지모는 고문 여독으로 출옥 후 얼마 안 되어 요절하였다. 신두성 또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하였다. 오진환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하였다. 박일봉은 국내에서 피신을 다니다가 일생을 마쳤다.
[의의와 평가]
좌천 장터 3·1 운동은 정관면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좌천 장터에 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고 일본 군경과 싸워 체포 인물들을 구출해 내는 등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좌천 장터 3·1 운동에서 보여준 지역민의 저항 의식은 1920년대 기장 지역의 청년 운동, 여성 운동,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