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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갑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16
한자 林甲守
영어음역 Im Gapsu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못골로 97-10[대연동 134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
성별
대표경력 제7대 국회 의원
출생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9년 - 선린상업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총무 부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1월 - 민족자주연맹 중앙 집행 위원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11월 10일 - 진보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4월 9일 - 통일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 총무 위원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5월 - 경상남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징역 5년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제7대 국회 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69년 - 공화당 입당
몰년 시기/일시 1981년 9월 1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임갑수 출생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1346
거주|이주지 임갑수 거주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221
학교|수학지 선린상업학교 - 서울특별 용산구 청파동3가 131-2
활동지 건국동맹 - 인천광역시
활동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 인천광역시
활동지 인천노동조합 원호회 - 인천광역시
활동지 민족자주연맹 - 인천광역시
활동지 진보당 - 부산광역시
활동지 통일사회당 경남도당 - 부산광역시
활동지 국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정의]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자 혁신계 정치인.

[가계]

아버지는 임사용(林士用)이고, 어머니는 허순명(許順明)이다. 1950년대 부산에서 활동한 시인 임하수(林河守)가 친동생이다.

[활동 사항]

1. 1950년대까지

임갑수(林甲守)는 1920년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1346번지에서 태어났다. 1939년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과 서울 및 부산 등지에서 상업·운수업·어업 등에 종사하였다. 1943년 11월경 인천에 거주하던 시절 항일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에 가맹하여, 인천시 조직책으로 조직 사업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한성고 학생회 사건으로 피검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일보사 인천 지사장으로 지국을 운영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총무 부장을 지냈다. 또한 인천노동조합 원호회 재정 부장을 지내는 등 인천 지역에서 꾸준히 노동 운동을 계속하였다.

1947년 1월 임갑수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규식(金奎植) 등이 결성한 민족자주연맹에 가맹하여 중앙 집행 위원 겸 인천 연맹 재정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부산 갑구에서 출마하였지만, 차점으로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임갑수조봉암(曺奉巖)을 만나 혁신 정당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의 선거 운동에 중심적으로 참여하였고, 1956년 1월경 조봉암이 내걸었던 진보당의 정당 정책에 찬동하여 입당하였다. 11월 10일 진보당이 창당될 당시 중앙당의 농민부 간사 및 진보당 경남도당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경남도당은 진보당의 지방 조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1956년 12월 9일 결성되었을 뿐 아니라, 부두 노조원과 사복 경찰의 난입으로 진보당 부위원장 박기출의 사무실로 대회장을 옮기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끝내 대회를 개최하는 강고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진보당이 와해되고, 이듬해 당수인 조봉암이 사형당하자 임갑수도 모든 정치 활동을 접고 칩거하였다.

2. 1960년대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붕괴하자, 혁신 세력의 정치적 결집체로 등장한 사회대중당에서 경남도당 결성 준비 위원회 상임 의장에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7·29 총선에서 혁신 세력이 참패한 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사회대중당은 사회당·사회대중당·통일사회당으로 재편되었는데, 임갑수는 1961년 3월 통일사회당에 입당하였다.

임갑수는 4월 9일 통일사회당 경남도당 결성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준비 위원회 총무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상남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기소되어 군사 법정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67년 신민당 당기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7년 신민당 소속으로 제7대 국회 의원에 출마하여 부산 동래에서 당선되었다. 하지만 1969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71년 공화당 산업 건설 분과 위원, 1975년 공화당 노동 분과 위원을 지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동국기업의 대표 이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 9월 1일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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