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서희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90
한자 徐熹淳
영어음역 Seo Huisun
이칭/별칭 치회(穉晦),우란(友蘭),숙헌(肅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달성(達城)
대표관직 경상도 관찰사|호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79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16년 -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1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24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25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27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27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29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33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35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36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3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0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6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7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7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4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몰년 시기/일시 1857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35년 1월 - 순상국 서공 희순 거사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875년 - 숙헌 시호 제수
부임|활동지 대구 경상 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
사당|배향지 서희순 거사비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치회(穉晦), 호는 우란(友蘭). 할아버지는 예조 판서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서유녕(徐有寧)이고, 아버지는 군수(郡守)를 지낸 서응보(徐應輔)이다. 어머니는 김현주(金顯柱)의 딸이고, 부인은 심능식(沈能植)의 딸이다. 동생은 병조 판서, 예조 판서를 지낸 서대순(徐戴淳)이다.

[활동 사항]

서희순(徐熹淳)[1793~1857]은 1809년(순조 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16년(순조 16)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조정에 출사하여 순조·헌종·철종을 모셨는데, 순조 대에는 1818년(순조 18) 예문관 대교, 1824년 성균관 대사성, 1825년 이조 참의, 1827년 사간원 대사간, 이조 참판, 1829년 개성부 유수, 1833년(순조 33)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헌종 대에는 1835년(헌종 1) 사헌부 대사헌, 1836년 형조 판서, 1838년 한성부 판윤, 1840년 예조 판서, 1841년 병조 판서, 1846년 의정부 좌참찬, 1847년 이조 판서와 총위 대장, 1848년 호조 판서 등을 지냈다.

철종 대에는 1855년(철종 6)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서희순의 특이한 이력은 문관(文官)이지만 무관직(武官職)인 총위 대장(總衛大將)[摠衛使]을 역임한 것이다. 19세기 후반 자료인 『임하 필기(林下筆記)』에도 서희순이 총위사[총위영의 수장. 총위영은 총융청이 1846년 개칭된 것으로, 1849년 총융청으로 다시 바뀜]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더욱이 헌종이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내기 위해 관왕묘 가을 제사 때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겸관(兼官)하게 하여 세 군영을 관장함으로써 보는 이들이 영화롭게 여겼다고 하였다.

서희순이 부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경상도 관찰사 선정비를 통해서이다. 서희순 거사비는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 기장 공덕비군 내에 있다. 경상도 『도 선생안(道先生案)』에는 서희순이 1833년 4월 17일 직제학(直提學)에서 경상도 관찰사로 되었고, 5월 27일 경상 감영에 도착하여 이듬해인 1834년(순조 34) 12월 22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도사(都事) 최치곤(崔致坤)과 함께 약 1년 6개월 동안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였다.

서희순 선정비에는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 누가 세웠는지를 알 수 있는 비문이 없어 기장 군민과 서희순의 관련성을 알 수는 없다. 『순조실록(純祖實錄)』에는 서희순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경상도 고을에서 바치는 대동목(大同木)을 전부 돈으로 바치도록 요청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순조는 호서(湖西) 지방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으니 이것을 전례로 삼아 경상도에서도 대동목을 돈으로 바치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동목을 돈으로 납부하는 일은 정조 대부터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되어 온 것이었다. 목화의 작황에 따라 대동목 납부 여부가 결정되었으므로, 흉년이 들면 백성들은 조세 부담이 커졌다.

조세를 목면에서 돈으로 납부하게 되면 품질 저하에 따른 관의 점퇴(點退)[받은 물건을 살펴보아 마음에 들지 아니한 것은 도로 물리침] 행위도 막을 수 있고, 흉년과 관계없이 조세 납부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쌀이나 목면으로 조세를 바치던 것이 돈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다. 서희순도 이러한 어려움을 조정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기장군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경상도 관찰사로서 베푼 선정 중에 기장 군민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 있어, 관찰사 업무가 끝난 다음 해에 선정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훈과 추모]

서희순이 경상도 관찰사를 마치고 돌아간 직후인 1835년 1월에 세워진 순상국 서공 희순 거사비(巡相國徐公熹淳去思碑)가 있다. 또한 현재 남한산성 비석군 내에 유수 겸 수어사 서공 희순 선정비(留守兼守禦使徐公熹淳善政碑)가 있다. 1875년(고종 12)에는 고종으로부터 숙헌(肅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