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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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守龍 |
영어음역 | Yi Sur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길338번가길 6-27[성북동 46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수룡(李守龍)[1911~1998]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서 태어났다. 권필옥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부산에서 사립 소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의 모멸적 언동과 차별 대우를 체험하면서 민족의식을 쌓아 가던 중 김근도(金根道)가 중심이 된 재대판가덕인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재대판가덕인친목회가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되자 김근도·이수강(李壽康)·김성규(金成奎) 등은 1934년 3월경 새로이 가덕인청년부회(加德人靑年部會)를 결성하였고 이수룡도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가덕인청년부회는 재일 동포 청년의 결속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민족의 독립 의식을 지도 계몽하여 조선 독립의 기운 양성에 노력하며 장래 그 추진력이 되게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표면상으로는 체육 활동과 상호 친목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1937년 3월부터 1938년 6월까지 종종 오사카[大阪] 낭속구에 있는 박동화 집 등에서 모여 수차에 걸쳐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가덕인청년부회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면서 널리 동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일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식량 결핍으로 일본에 내란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포착하여 소련과 제휴한 뒤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후 이들은 1938년 7월부터 1939년 1월까지 수차에 걸친 가덕인청년부회 특별 좌담회를 통하여 회원들에게 일제의 한국인 차별 정책을 폭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러한 활동 중 이수룡을 포함한 이수강·김성규·김근도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수룡은 1942년 9월 오사카지방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8년 7월 3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정부에서 이수룡의 공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