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332 |
---|---|
한자 | 鄭德生 |
영어음역 | Jeong Deoksaeng |
이칭/별칭 | 정치영(鄭致榮)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로28번길 41[고촌리 283]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근대 부산 지역 출신의 목사.
[활동 사항]
정덕생(鄭德生)은 1881년 8월 30일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283번지에서 정재진과 오성결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정치영(鄭致榮)이었으나, 1911년 7월 15일 정덕생으로 개명하였다. 어릴 때는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다른 형제들은 불교를 믿었지만, 정덕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02년 손안로 선교사와 함께 경상남도 통영군 욕지도에 동항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에 동래군 안평교회 설립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에서 1902년 이전에 개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호주 선교사로 한국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겔슨 엥겔(Gelson Engel)[한국명 왕길지, 1864~1939]과 관련 있는 점으로 보아 호주 선교부와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장 지역은 경상남도 어느 지역보다 민족 사상이 강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교회를 민족정기를 보존하는 중심체로 삼고 신앙 중심으로 지역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예배당의 건립이 필요하였으나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다. 정덕생은 경상도 지역 신앙의 대부인 겔슨 엥겔 선교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산진교회나 나병원을 설립한 것에 힘을 얻어 기장 지방의 유지였던 정영조를 비롯하여 정영조의 친척 수십 명을 전도하였다.
정덕생은 겔슨 엥겔 선교사, 손안로 선교사와 합심하여 교회 40여 곳을 설립하였는데, 1905년 동래읍교회[수안교회], 동래군 기장동부교회, 의령군 주암교회, 통영대화정[현 충무교회], 1906년 함안군 부봉교회, 백산리교회, 함안읍교회, 영산읍교회를 세웠다.
1906년 2월부터 유급 조사(助事)로 안평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그리고 손안로와 겔슨 엥겔의 조사로 활동하면서 부산진교회에 출석하였다. 조사는 선교사를 돕고 지역을 순례하며 교역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교역자가 배출되기 이전에는 선교사의 지도하에 조사가 선교사의 순회 전도, 심방(尋訪), 치리(治理) 등을 보좌하며 미조직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담당하였다.
1908년 동래군 장전리교회[현 철마교회], 동래군 금사리교회, 1909년 동래군 송정교회를 세웠다. 1910년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9월 18일 대구 남문교회당에서 개최된 제5회 조선노회[독로회]에서 경남대리회를 대표하여 김봉명·김응진·이윤팔·이현필·심취명 장로와 함께 장로 총대로 참석하였다. 1911년 12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 경상노회가 창립될 때도 정덕생은 장로 총대로 참석하였다.
1911년 동래군 두구동교회, 1912년 동래군 신평교회[현 칠암교회]를 설립하였다. 1912년 3월 6일 대구 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서 신학 입학을 청원하였다. 이때 정덕생은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등과 함께 다시 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1912년 3월 평양의 장로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교육을 받고, 1915년 제8회로 졸업하였다. 28명의 졸업생 중에는 방효원, 류여대, 서정오, 이기선, 이자익, 정재순 등이 있다. 정덕생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 준사의 자격을 얻었다. 1912년 9월 1일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때 경상노회를 대표한 총대로 참석하였다. 1913년에 동래군 화전리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1913년 9월 7일 서울 소안동 예배당에서 모인 제2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한덕룡 목사와 같이 경상노회 총대로 참석하였고, 1914년 7월 2일 모인 제8회 경상노회에서 노회원들의 투표로 총회 총대에 선출되었으며, 1914년 9월 6일 황해도 재령 남산현 예배당에서 개최한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장로 총대로 참석하여 총회 주일공과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경상노회, 혹은 경남노회 대표로 노회와 총회에 참석하여 부산·경상남도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적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정덕생이 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15년 6월 20일 대구동산성경학교에서 개최된 제10회 경상노회에서 서정오, 정재경과 함께 강도사로 인허되었다. 특히 이 노회에서 정덕생은 목사로 청빙(請聘)되었다. 1915년 7월 13일 지금의 초량교회인 영주동 예배당에서 임시 회장 제임스 노블 매켄지(James Nobel Mackenzie)[한국명 매견시, 29년간 부산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본 나환자들의 대부]의 사회로 정덕생의 위임 예배가 열렸으며, 이 예배에서 정덕생은 목사가 되었다. 1915년 7월부터 부산의 4교회인 초량교회, 항서교회, 제일영도교회, 조도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이래 장로 총대, 목사로 노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등 경상도 지방 교회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특히 1918년 12월 경남노회 제6회와 1924년 1월 제16회에서는 노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7년 9월 1일 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회 총회에서 신학 교육부는 정덕생 목사를 일본 고베신학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로 한 일을 보고하고 이를 채용한 일이 있다.
체격은 작았으나 명석하고 지혜로웠던 정덕생은 부산·경상남도 지역 초기 사역자로서 지역 복음 운동의 초석을 쌓았던 인물이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함께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정덕생은 안희제(安熙濟)가 세운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였고, 또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광산업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정덕생은 초량교회 목사로 재임 중인 1922년 2월 제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평안북도 중강진 경찰서까지 압송되었다. 부산에서 중강진까지는 981.82㎞[2,500리]가 넘는 먼 길이었는데, 16일간 유치장에서 고생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1949년에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