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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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城 |
영어의미역 | Japanese Castl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부산 지역에 일본군이 축조한 일본식 성.
[개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보급로의 확보를 위해 축조한 전성(傳城)[繫城]이라든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조선에 머물기 위해 하루 일정마다 평양·한성부·부산 간에 축조하였다는 어좌소(御座所), 일부 읍성 가운데 보이는 일본식 성벽도 광의의 왜성(倭城)에 포함할 수 있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진성과 동래성, 다대포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곧바로 전선에 병력과 물자 보급을 위하여 부산 왜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11월경에는 한성(漢城)의 남산과 평양 등지에도 왜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한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활약과 각지 의병의 봉기, 그리고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거지 확보를 위하여 1593년(선조 26) 5월경에는 경상도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기까지 왜성을 축조하였다.
또한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켜 재차 침입하였는데 임진왜란[1592~1596] 때 축조한 왜성은 서생포 왜성, 임랑포 왜성[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기장 죽성리 왜성[기장군 죽성리], 동래 왜성, 부산 왜성, 자성대 왜성[동구 좌천동], 동삼동 왜성, 구포 왜성[북구 구포동], 김해 죽도 왜성[강서구 죽림동], 죽도 왜성의 지성[신답·마사 왜성], 가덕도 왜성, 안골포 왜성, 웅천 왜성, 웅천 왜성의 지성[자마·명동 왜성], 거제 영등포 왜성·장문포 왜성 등이고 정유재란[1597~1598] 때는 울산에서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어 울산 왜성을 비롯한 양산 왜성[증산 왜성], 창원 왜성[마산 왜성], 거제 왜성동 왜성, 고성 왜성, 사천 왜성, 남해 왜성, 순천 왜성 등을 신축하였다.
[형태와 특징]
왜성의 특징은 입지적으로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강이나 바다에서 500m 이내의 거리에서 내려다볼 수 없는 독립된 구릉을 택하여 축성하였다. 형태상으로는 산꼭대기나 산허리를 깎아 본성(本城)을 설치하고 그 아래 해안이나 평탄지까지 외곽부를 성벽으로 두르는 평산성(平山城)식으로 축조하였다.
평면 구조상으로는 산 정상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수의 곽(郭)[曲輪]을 배치하거나 본환(本丸)·이지환(二之丸)·삼지환(三之丸) 등과 같이 단을 지어 독립된 소구역을 여러 개 두었으며, 그 외곽에 각종 해자[空堀]를 배치함으로써 한 개의 성이 수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독립적인 방어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성벽은 60~70° 경사지게 쌓는 것이 특징으로, 외면은 대부분 자연석이나 할석을 면석으로 쌓고, 그 안쪽에는 작은 돌[栗石]을 채워 견고하게 한 뒤 다시 흙으로 충분히 다져서 석축 성벽을 보호하였다. 왜성의 외곽부는 토축 또는 목책 위주로 성벽을 구성하나, 중심부의 성벽은 대부분 석축으로 축조한 경우가 많으며, 성벽은 각이 지게 굴곡을 많이 주어 측면 방어에 용이하게 하였다. 잔존 석축의 높이는 대개 3~10m이다.
[현황]
부산 지역에는 기장 임랑포 왜성, 죽성리 왜성, 증산 왜성, 자성대 왜성, 구포 왜성, 죽도 왜성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임랑포 왜성은 소규모이지만 훼손되지 않은 상태이며, 죽성리 왜성은 중심부와 외곽부를 포함한 자연 환경이 양호한 편이다. 자성대 왜성은 3단의 성벽이 높이 5m 이상으로 남아 있다. 구포 왜성은 도심지 인근 왜성으로 대부분의 성벽 구조물이 잘 남아 있다. 죽도 왜성은 성내에 공동묘지가 있어 비교적 개발이 덜된 상황이어서 임진왜란 당시 성벽 구조물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