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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철강 노동자 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235
한자 聯合鐵鋼勞動者鬪爭
영어의미역 Labor Strife at Yonhap Steel Union Steel Co., Ltd.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노재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운동
관련인물/단체 연합철강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8월 27일연표보기 - 갑반 노동자의 농성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7년 9월 13일연표보기 - 합의 타결
발단 시기/일시 1987년 4월 1일 - 부당 인사 발령
전개 시기/일시 1987년 9월 1일 - 총 파업
발생|시작 장소 연합철강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종결 장소 연합철강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정의]

1987년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는 연합철강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연합철강은 1962년에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창립된 철강 제조 업체로, 1987년 당시 노동자 수는 2,000여 명에 달하였다. 1975년에 건설된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비록 노사 협조적인 한국노총 산하의 조직이었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산 지역에서 가장 선도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조합이었다.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1980년 봄 임금 인상 투쟁에서 5월 13일 전면 파업 투쟁을 이끌기도 하였다. 비록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의 전국 비상 계엄령에 부딪쳐 좌절되었지만 이 투쟁은 5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1985년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무려 1년 6개월 동안 ‘반(反) 동국제강 인수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77년 연합철강을 흡수했던 국제그룹이 1985년 해체되면서 국제그룹에 속해 있던 연합철강을 동국제강이 인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1차 투쟁이 끝난 1986년 8월 14일까지 약 50일 간에 이르는 농성 투쟁에는 하루 평균 1,031명의 조합원이 참가할 정도로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경과]

장기간의 ‘반 동국제강 인수투쟁’ 끝에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중앙대책협의회[재무부, 노동부, 안기부 등으로 구성]의 위임을 받은 지역대책협의회와 협약을 맺어, 새로운 전문 경영인 체제를 구축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부분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동국제강의 연합철강 인수 포기’라는 노동조합의 요구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내용이어서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고, 이는 1987년에 다시 되살아났다.

1987년 4월 1일 연합철강은 ‘반 동국제강 인수투쟁’의 선두에서 활동한 4명의 사원을 부당하게 대기시키는 인사 발령을 단행하였다. 더욱이 인사 발령의 부당함을 항변하던 사원 98명까지 전격적으로 인사 발령 조치하였다. 이로써 장장 5개월여에 걸친 1987년 연합철강의 노동자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부당 인사 발령에 대해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행정 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회사 내에서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식으로 대항하였다.

7월 8일 회사 측은 다시 해고 발령을 감행하였고,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8월 27일 갑반 퇴근자들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농성이 확대되면서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9월 1일 총 파업에 돌입하여 이후 13일 동안 파업 투쟁을 지속하였다. 9월 13일 늦은 밤 노동조합과 회사는 1987년 11월 말까지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것을 골자로 합의 타결하고, 파업을 종식시켰다.

[결과]

노사가 합의한 현지 법인 설립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12월 9일 현지 법인 설립 약속 불이행으로 사용자, 정부 당국, 주거래 은행에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투쟁은 1988년을 넘기면서까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1987년 연합철강의 노동자 투쟁은 여타의 다른 사업장과 달리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이런 사례는 어용 노조가 판치던 이 시기 노동계에서 매우 드문 경우로서, 노조 집행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를 넘기는 투쟁이 연합철강에서 진행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합철강 노동자 투쟁은 기업 내부의 문제에 한정하여 진행됨으로써, 지역 내 다른 조직과의 연대 투쟁에는 소홀했으며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이처럼 개별 사업장에 매몰된 조합주의적 의식은 이후 투쟁을 전개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강** 당시의 동료들 잘 계시는지.. 2017.06.01
강** 당시 현장에 있었던 직원으로서 흥미를 가지고 검색했는데
작성자님께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분석자료라 기분이 좋습니다.
분규현장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었죠.
2017.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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