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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모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148
영어의미역 The Meeting of Ssial[Embryo]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장전동 산3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 운동 단체
설립자 안승운|노승일 등
설립 시기/일시 1970년대 중반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80년 5월경 - 해체
최초 설립지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 63번길 2[장전동 산 30]지도보기

[정의]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 조직된 청년 학생들의 소모임.

[설립 목적]

씨알의 모임은 한국 사회의 비판적 대안을 모색하던 부산대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부산 지역의 청년 학생들이 함석헌(咸錫憲)의 씨알 사상을 지도 사상으로 삼고자 결성하였다.

[변천]

1970년대 중반 부산대학교 철학과 안승운과 정치외교학과 노승일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고신대학교 등의 학생들로 결성된 비공개 모임이었다. 1975년 10월 노승일이 부산대학교에서 발생한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일명 김오자 사건]에 연루되면서 상당 기간 모임이 중단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안승운이 다시 모임을 재개하여 1980년 5월까지 지속되었으나, 전두환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안승운이 구금되면서 모임이 중단되고 이후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주요 활동은 함석헌이 1970년에 발행한 잡지 『씨의 소리』 등 진보적인 서적을 읽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 민주화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었다. 장소는 주로 장기려의 복음 병원 사택이나 회원의 집 등이었고, 때로 병원이 쉬는 날에는 보수동의 책방 골목에 있던 유기선 내과 병원의 원장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당시 정기적으로 부산에 와서 강연을 하던 함석헌과 만남과 토론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구성원의 수는 십 수 명에 그쳤으며 대학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비공개 모임이었지만, 모임의 배지를 만들어 달고 다닐 정도로 구성원들은 강한 결속력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대학교에서 조직적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비공개 서클의 모습을 보여주고, 함석헌의 사상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학생 운동이 재야 운동과 연계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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