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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812
한자 釜山埠頭勞動者總罷業
영어의미역 General Strike of Busan Wharf Labor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운동
관련인물/단체 부산부두노동조합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7월 17일연표보기 - 1차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52년 7월 31일연표보기 -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52년 7월 29일 - 2차 파업 단행
발생|시작 장소 부산항 부두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지도보기

[정의]

1952년 부산부두노조의 노동자들이 전개한 총파업.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이 일어나자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물가는 임금 상승을 훨씬 상회하였다. 특히 임시 수도인 부산은 전쟁 전 40만이던 인구가 100만을 돌파하면서 물가 폭등의 조짐이 완연하였다. 1951년 7월 초에 부산 시내 시장에서 한 말에 4만원 내외이던 백미가 1952년 4월 중순에는 8만 원, 7월말에는 13만 3000원으로, 1년 만에 무려 3배 이상 올랐던 것이다. 이에 부두 노무자들이 받는 일용 노임 4,800원과 청부 노임 1만 2000원으로는 하루에 두 끼도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과]

1952년 대한노총자유연맹과 산하의 부산부두노동조합은 6월 말로 끝나는 주한미군과의 작업 계약 갱신 입찰을 앞두고 임금 인상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전국 항만을 쟁의 범위로 하는 ‘대한노총자유연맹 노임인상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부산부두노조는 각 하역 회사와 단체 교섭을 벌였으나 회사에서 반응이 없자, 7월 1일부터 실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미군 제2병참기지사령부는 7월에 임금 인상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7월 14일 이후에는 인상을 기피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부산부두노조 측은 최후통첩을 통고했으나 반응이 없자 7월 17일 부산항 제2·3·4 부두 및 중앙 부두 하역 작업 종사자 1,600여 명이 아침 7~8시 사이의 교대 시간에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군대의 작전 수행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하역업자 대표와 부산부두노조 위원장과의 협의 끝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제1차 파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후 하역 회사 측이 양보하지 않아 미군 당국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7월 29일 부산부두노조는 제2차 파업을 단행하였다. 7월 30일에는 일부 외자 하역 노동자까지 가담하였다.

[결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7월 31일 노사 당사자와 미군을 합석시킨 회합에서 타협안을 이끌어내어 무기한으로 시작한 파업은 3일 만에 종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은 노동조합 상층부의 요구가 아니라, 아래에 있는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쟁 의지가 동력이 되었다. 또한 선거와 전쟁의 수행 속에서 정부와 미군을 효과적으로 압박하여 양보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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