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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45
영어음역 Bak Munh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98번길 129-10[칠산동 319-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조선공산당재건동맹원
출생 시기/일시 1907년 10월 1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8년 3월 - 동래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9년 9월 - 화북대학 사회학부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취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동래청년연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3월 -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1월 -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2월 14일 - 사회주의자 검거 선풍에 상하이에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2년 6월 15일 - 나가사키지방법원에서 공금 횡령죄로 1년 6개월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3년 9월 6일 - 만기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0월 -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사건으로 동래에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4년 4월 5일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몰년 시기/일시 1934년 10월 3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5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19-1
학교|수학지 동래고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중국 베이징
활동지 중국 상하이
활동지 서울특별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인데, 박용한은 대한제국 탁지부 기사였다. 기장 출신의 항일 운동가인 김두봉(金枓奉)은 어머니 김맹련의 사촌 동생이자 박문호에게는 외오촌 당숙이 된다. 박문호의 형제로 박문희(朴文熺)·박문하·박수정·박차정(朴次貞)이 있으며, 박문희·박차정도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차정의 남편은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金元鳳)이다. 기장면 3·1 운동 주도자 중의 한 명이며, 동래 지역 청년 운동 등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던 박공표(朴孔杓)[박일형]도 먼 인척이다.

[활동 사항]

박문호[1907~1934]는 1907년 10월 16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5번지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준비하던 1918년 1월, 아버지 박용한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의분하여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아버지의 자결은 박문호 형제에게 큰 충격이었고 일찍부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갖는 한 계기가 되었다. 박문호는 곧 동래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청년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형인 박문희동래청년연맹 집행 위원장을 역임하였던 박일형의 영향이 컸다.

1924년에는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취업하였다. 동래청년동맹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박문호는 1929년 3월 동래누룩조합 공금 1,500원을 가지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다. 1929년 5월 상하이[上海]로 가 외가의 인척인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을 만났고 김두봉의 소개로 중국어 교사 정해리(鄭海理)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베이징에 있는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박건웅을 소개받았다. 1929년 7월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박건웅의 소개로 9월에 화북대학 사회학부에서 수학하는 한편 11월에 김원봉박건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2월 근우회 상무 집행 위원이며 조사연구부장인 여동생 박차정이 유치장에서 가석방되어 있음을 알고 동생을 베이징으로 망명시켰다. 당시 박문호조선공산당재건동맹 북평지부 선전부 책임자로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부설 교육 기관인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1년 10월 베이징 일본공사관에서 사회주의자 검거 선풍이 불자 잠시 톈진[天津]으로 피신해 지하공작을 하다가, 12월 14일 같은 동포의 밀고로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다. 1932년 6월 15일 나가사키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아 우라카미형무소[浦上刑務所]에 수감되었다. 이때 망명시 동래누룩조합에서 횡령한 1,500원을 가지고 간 것만을 인정하여 공금 횡령죄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이나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에 관한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1933년 9월 6일 만기 출소하였다.

출소한 지 한 달 만인 1933년 10월 초 박문호는 다시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사건으로 동래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에게 이수양 등이 체포되면서 박문호의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박문호는 서대문경찰서에서 피의자 심문 조서를 받고 기소되어 1934년 4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검찰 심문을 받던 중 가혹한 고문에 의해 병을 얻어 가석방되었으나 1934년 10월 3일 28세의 나이로 동래에서 사망하였다. 1934년 10월 동래 청년 단체의 주도하에 장례가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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