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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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航 |
영어의미역 | Stowing awa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정식 절차를 밟지 않거나 운임을 내지 않고 부산에서 일본으로 몰래 도항하는 일.
[개설]
밀항이란 어떤 종류의 장해나 제한에 의해 이동을 방해받고 있는 자가 통상적인 수단 이외의 방법으로 이것을 실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1960~197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하였는데,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부산과 제주도, 거제도 등은 일본으로 밀항하는 주요 통로였다.
[밀항의 배경]
일제 강점기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도항하였다. 유형별로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항과 구직자의 가족으로서 구직자와 동반해서 도항하거나 구직자가 취업을 한 후에 초청하여 도항하는 경우, 진학 또는 면학을 목적으로 도항하는 경우, 뚜렷한 목적 없이 도항하는 경우, 총동원 정책으로 일본의 전쟁에 동원된 경우 등이다.
그런데 일제는 노동력 수급의 조정과 치안의 유지라고 하는 사회 전체의 경제·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일본으로 도항하는 조선인을 막고 억제함으로써 이를 조절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으로의 도항을 저지하고 통제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많은 밀항자를 낳았다.
특히 일제의 경제적 수탈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많은 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노동을 목적으로 빈번하게 밀항하였다. 1930년대 후반 한 잡지 기사에 따르면, 도항 관리 제도가 생긴 후 밀항이 숱하게 발생하여 “항도 부산의 범죄 사상에 신기록을 지어내는 중대 사회문제인 동시에 특수 범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 점유 권리는 상실되었고, 이후 군정의 조치에 따라 조선인과 일본인의 양국 입국은 제한·금지되었다. 하지만 밀항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이후의 밀항은 6·25 전쟁기와 국민 국가 시스템과 냉전 구도가 안정화·공고화되는 1960년대 전후한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해방 이후 6·25 전쟁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극도의 생활난과 국가 폭력, 그리고 전쟁이라는 절대적 공포를 피하기 위해 도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에 있는 친지나 가족을 찾아 떠나거나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받던 자, 혹은 일반 피난민들, 그리고 국군이나 지역의 정치·경제적 권력자들의 밀항이 많았다. 한편 1960~1970년대에는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 한다기 보다는 구직이나 가족 찾기, 학업 등 사적인 문제들을 개별적·분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밀항의 실태]
일제 강점기 밀항은 자신 혹은 밀항 브로커가 준비한 소형 발동기선을 이용하거나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 바닥에 몰래 숨어서 하는 형태가 많았으며,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고용되어 승선했다가 상륙 후 돌아가지 않는 경우[脫船]도 있었고, 도항에 필요한 증명서를 위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개는 큐슈[九州]와 츄코쿠[中國], 특히 후쿠오카[福岡],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등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과 오사카[大阪], 도쿄[東京], 아이치[愛知], 가나가와[神奈川], 교토[京都], 효고[兵庫] 등 대도시로 밀항하였다.
밀항자 수와 관련해서는 일관된 기록은 없으나 당시 『동아 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체포된 밀항자가 1920년대 초·중반에 556건, 3,839명이었다고 하고, 일본 내무성 경보국 자료에는 1930년대 초에는 1,000명 이하, 중반에는 2,000명 전후, 후반에는 2,000~7,0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자료 등에 따르면 조선에서 체포된 밀항자는 1930년대 초 4,596명, 1930년대 중반 3,200명이라 하여 이미 조선에서 체포되는 밀항자 수도 많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밀항 성공률이 낮지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 밀항자 수는 상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주로 어선을 이용하여 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여수나 통영, 거제도, 제주도, 부산으로부터 쓰시마[對馬]를 통하여 밀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략적인 밀항자 수는 적발된 밀항자를 수용하였던 오무라[大村] 수용소의 통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1950년 12월부터 1970년 9월까지 오무라 수용소에서 남한으로 송환된 자는 약 1만 6400명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1950년부터 1952년까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1956년까지는 1년에 2,000명 이상이 송환되고 있었다. 이후 1961년 무렵까지는 연간 약 1,000여 명 선을 보이다가 1962년~1970년 사이에는 전체적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어 연간 200~600여 명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밀항에 대한 단속]
일제 강점기 일제는 조선인의 밀항을 단속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전담 경찰관을 배치하는 한편 밀항 브로커의 명부를 작성하여 상시적으로 시찰했으며, 연안 주요 부락에서의 감시를 위해 경찰 연락원 배치, 밀고자에 대한 상여 지급, 주민에 대한 계발의 실시, 부산 이외의 항구에서의 경계 강화, 경비선 고성능화 등 적극적인 저지책에 나섰다.
일본 측에서도 발견된 밀항자를 조선으로 송환한다는 원칙하에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 주민들과 협력하여 밀항자 발견에 노력하였고, 증명서의 부정 사용을 막기 위해 사용자의 외견적 특징을 기술했으며, 탈선(脫船)을 방지하기 위해 어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에 대해 경찰이 발급하는 신분 증명을 소지하도록 의무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상륙하여 일본에서 통상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는 밀항자의 송환은 현실적으로 곤란하였다. 당시 송환율을 살펴보면 1930년경 50%, 1934년까지 70~80%, 1939년까지 90%, 1940년 이후 60%~12.6%로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밀항자가 많았던 도쿄와 오사카의 송환율이 높았던 것에 비해 후쿠오카와 나가사키의 경우 밀항자 수는 많았지만 탄광 노동자 부족 등의 사정으로 송환율은 매우 낮았다. 이에 이들을 조선인에 대한 지도 명목으로 창립한 중앙협화회(中央協和會)에 가입시켜 그 관리·통제 하에 두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밀항자들에 대한 엄중한 단속을 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밀항자가 급증하자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엄벌에 처할 것’임을 경고하였고, 부산과 거제 등지에서는 경상남북지구 계엄민사부가 직접 밀항을 단속하거나 처리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밀입국자단속법」을 제정하여 보다 체계적인 단속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서는 검찰을 비롯한 경찰, 해상보안부, 각 마을 주민들까지 동원되어 밀항자를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치안 협력대’를 조직하여 밀항자 체포에 나서기도 하였다. 적발된 밀항자는 송환으로 처리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관리는 수용소라는 별도 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일본 내 몇몇 임시 수용소들이 담당하다가 1950년 10월 이후로는 오무라 수용소가 본격적으로 전담하였다.
[의의 및 평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지속된 밀항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해방 공간에서의 이념 대립, 6·25 전쟁 등을 배경으로 밀항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삶과 맞물려 있는 문제로,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