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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448
한자 獨立促成國民會釜山支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46년 3월 20일연표보기 -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8월 - 8·15 1주년 기념행사 좌우익 공동으로 준비
최초 설립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산회관 - 부산광역시

[정의]

1946년 부산 지역에서 설립된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지부.

[설립 목적]

1946년 초 신탁 통치 논쟁을 거치면서 우익 세력은 ‘반탁=민족’이라는 명분을 획득하였다. 우익 세력은 ‘찬탁=반민족’ 임을 내세워 좌익 세력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946년 3월까지도 좌익 세력은 정치 사회 운동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우익의 조직화는 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해서 가능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과 운동은 우익 세력으로부터 ‘민족적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등의 주요 우익은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독립촉성국민회는 일종의 우익 연합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는 좌익의 주도권을 무력화시키고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우익의 연합 전선을 펴기 위한 목적으로 빠르게 조직되어 갔다.

[변천]

독립촉성국민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되어 1946년 2월 8일에 결성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지방 위원에는 최석봉(崔錫鳳)이 임명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는 1946년 3월 20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산회관에서 조직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의 부서와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최석봉, 부회장 장지원(張志元)·김한규(金漢圭), 총무부 이경호(李庚浩) 외 2명, 재무부 최명구(崔命九) 외 2명, 선전부 하기락(河岐洛) 외 3명, 조직부 박춘식(朴春植) 외 3명, 문교부 김지병(金知丙) 외 2명, 산업부 신우균(申佑均) 등이었다. 그 외에 농민, 교육, 후생, 청년부와 서기국을 두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에는 김지병, 하기락김철수(金喆壽)가 운영하는 『자유 민보』 인사들과 최석봉, 장지원, 김한규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참가하고 있었다. 독립촉성국민회 경남지부는 1946년 3월과 4월 사이에 엄진영(嚴進永)을 대표로 조직되었다.

일반적으로 지방의 독립촉성국민회는 각 시군 읍면의 조직과 도 조직 간에 횡적, 종적 연대나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 지방 조직은 하나의 독립된 세포로서 이승만(李承晩) 추종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의 독립촉성국민회는 부산시지부를 거쳐 군과 시 단위에서 연락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는 서울 중앙에서 추천받은 급사(急使)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의 문건은 전군(全郡)과 전시(全市)에 배포되었고 규정 시간 안에 독립촉성국민회 경남지부를 거쳐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1946년 8월 27일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에서는 ‘국민운동의 강력한 추진과 국민조직 강화를 위하여 지부의 쇄신 강화의 필요가 입증되었다고’ 하면서 간부를 재선임하였다. 8·15 기념행사 좌우 공동 준비 위원회에 참가하였던 최석봉, 김한규 등이 간부진에서 탈락하였다. 회장과 부회장 1명이 공석인 채로 자유민보사의 김지병이 유임되고 한민당 당원인 오이상(吳伊尙)과 광복청년회 경남지부의 이인목(李仁睦), 독청경남연맹의 김봉숙(金鳳淑) 등의 신간부가 등장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6년 4월 19일 우익 단체와 군정 행정 기관장, 법원, 검찰청, 금융 기관 및 민간 유지들은 독립촉성국민회 회의실에서 이승만 박사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환영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장 최석봉이 임명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 지방 지부는 이승만의 경상남도 순회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독립촉성국민회 지부는 경찰과의 협조 속에서 ‘좌익 깨부수기’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최석봉과 김한규 독립촉성국민회 경남지부엄진영 등은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8·15 기념행사를 우익과 함께 진행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준비 회의의 회장에는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윤일과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장 최석봉이 공동으로 선출되었다. 부산에서 좌우익간의 연합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경상남도 각지에서도 연합이 추진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장 최석봉은 1946년 8·15 1주년 기념사에서 “우리는 좌우를 버리고 당파적 편견을 떠나서 다만 민족적 양심으로 돌아가서 독립을 얻는데 총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며 좌우 연합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좌익 검거에 나섰고, 행정 명령을 발동하여 8·15 공동 기념행사를 불허하였다.

[의의와 평가]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는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각 우익 정치 사회 단체를 포괄할 수 있는 조직 틀을 제공하였다. 1946년 좌우익 공동으로 준비되던 8·15 1주년 기념행사가 좌절된 후 독립촉성국민회는 우익의 대표로서 등장하였다. 좌우 연합을 지향하던 민족 우파 인물들이 제외되고 극우 세력이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를 점거하였다. 이후 부산 지역의 우익과 좌익 세력은 완전히 결별하고 대립과 갈등 국면으로 들어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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