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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427
한자 大韓靑年團慶尙南道團部
영어의미역 Gyeongsangnam-do Agency of the Korean Yout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49년 2월 13일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53년 9월연표보기 - 해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8년 12월 19일 - 대한청년단 결성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정의]

1949년 부산 지역에서 설립된 대한청년단 소속 지역 단부.

[개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여순 사건을 겪은 후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사회와 군대 내부의 좌익 숙정 작업에 들어가는 등 반공 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여러 반공 청년 단체들을 통합 조직하여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을 설립하였다. 대한청년단은 군과 경찰을 보조하는 준군사 기구로서 언제든지 물리력으로 전환 가능한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아울러 대한청년단이승만 정부의 통치 이념을 실현시키고 대민 정책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강력한 사적 통치 기반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위상에 걸맞은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부산 지역의 대한청년단 단부 조직도 조직 체계를 갖추고 단원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민 활동을 강화하였다.

[변천]

대한청년단의 지방 조직 설립은 1949년에 들어 도 단위를 시작으로 시군 단위와 읍면 단위로 확대되었다. 1949년 2월 13일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교정에서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 결성식이 개최되었다.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는 기존의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청년조선총동맹, 서북청년회 등의 부산·경상남도 지역 청년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한 것이었다.

단장은 부산 지역 광복청년회의 제2대 단장이었던 이인목(李仁睦)이었다. 부단장은 광복청년회의 초대 단장을 역임한 한종욱(韓宗郁)이 맡았다. 대한청년단 부산시단부의 조직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동래군단부와 영도구단부, 중구단부, 서구단부, 북구단부 그리고 서면단부와 구포단부 등의 하부 단위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래군단부의 정성수(鄭聖壽), 영도구단부의 김성도(金聖道), 중구단부의 김임룡(金壬龍), 서구단부의 김일민(金日敏), 북구단부의 이달우(李達雨), 서면단부의 서영덕(徐塋德), 구포단부의 김용관(金容琯) 등이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 당시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부산시 중앙동 3가 8번지[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3가 8번지]에 위치하였다. 대한청년단이 1953년 9월 해체되어 민병대 조직에 흡수됨에 따라 이와 비슷한 시기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도 민병대 조직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청년단은 결성 이후부터 꾸준히 정치, 경제, 군사, 통일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각종 담화나 결의문을 발표하는 준정당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1951년 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 이후에는 관제 데모나 테러 활동에 동원되는 등 행동대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 각 지역의 대한청년단 단부에서는 지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청소 활동이나 야간 순찰 활동 같은 봉사 활동도 병행하였다.

대한청년단은 1950년 3월에 설립된 청년방위대를 운영하였다. 육군본부 직할로 19개의 청년 방위 사단이 창설되었고, 대한청년단 지방 단부의 단장들은 각 청년방위대 사단의 방위 단장을 겸임하였다.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 초대 단장 이인목은 부산 지역을 관할하던 청년방위대 제13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발발 후 국민방위군이 조직되었을 때, 청년 방위 대원들이 대거 여기에 합류하면서 청년방위대가 해체되었다. 대한청년단은 국민방위군 운영을 전담하였다.

6·25 전쟁 중 신문 기사에서 확인되는 부산 지역 대한청년단 단부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청년단 부산 중앙구단부는 1952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시민 위안의 밤을 개최하였다.” “대한청년단 경상남도단부는 부산 시가지 청소를 1952년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매일 오전 6시부터 한 시간씩 실시하였다.” “1953년 5월 18일부터 1주일간 아침 6시부터 2시간 단원 704명을 시내 청소 작업에 투입시켰다.” “대한청년단 부산시 중구 대청동단부 특공대원 3명은 1952년 11월 13일 밤에 야간 순찰을 하다 중국인 가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 미연에 방지하였다.” “대한청년단 신창동단부 부원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 청년들에게 수건 한 장씩을 주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청년단이승만 정부의 절대적인 지지 세력, 반공 투쟁의 최선봉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성격은 1953년 9월이 해체될 때까지 일관되었다. 부산 지역을 비롯한 지부 조직들도 기본적으로 반공 정치 투쟁을 최우선적인 사업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대한청년단이승만 정부 초기의 정치 기반, 민중을 통제하고 감시한 민중 통제 조직, 반공의 최선봉 선전가, 군대를 운영하고 군경을 보조한 준군사 기구로서 이승만 정부의 유지와 강화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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