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422 |
---|---|
한자 | 大學敎授團- |
영어의미역 | College Professors' Street Rallies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1960년 4·19 혁명의 과정에서 부산 지역 대학 교수단이 전개한 가두시위.
[역사적 배경]
1960년 3월 15일 총선거를 전후한 시기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시위는 4월 19일을 전후하여 정점에 이르렀다. 학생 데모에 대한 전 국민적 지지와 참여가 뚜렷해지면서 이제 시위는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양상을 띠어갔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인한 학생과 시민의 희생이 커지면서, 한국 사회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대학 교수단의 데모가 계획되었다. 4월 25일 서울에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대학 교수단의 거리 시위가 1시간 넘어 진행되었다.
[경과]
1960년 4월 26일 부산에서도 대학 교수단 데모가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부산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와 학생 및 간호원 등 152명이 부산시 서구 아미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의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을 나와 데모에 들어갔으며, 곧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와 학생 300여 명이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캠퍼스를 나와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데모에 들어가기에 앞서, 25일 서울의 교수단 데모에서 채택한 선언문 14개 항목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대학 교수단은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부정 선거를 조작한 자를 중형에 처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급차에 스피커를 달고 ‘민주 역적을 몰아내자’, ‘한희석 최인규를 처단하라’, ‘동포여 용감히 싸우라’, ‘자유, 민주, 기성 정당 전부 해체하라’, ‘4·19 학생 희생자에 책임지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부산대학교 교수단은 시청 앞을 지나 충무로와 광복동 등 시내 중심가로, 동아대학교 교수단은 서면까지 행진하였다. 대학 교수단이 가두시위를 벌이는 동안 연도에 선 시민들은 구호를 따라하며 박수와 함성을 치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윽고 대학 교수단의 데모에 학생 데모대와 군중이 합류하면서, 시청 앞 로터리는 8만여 군중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결과]
전국적인 학생 시위와 시민의 합류, 대학 교수단의 데모에 이르러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사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부산 지역의 대학 교수들은 학도 호국단의 해체, 어용 교수의 숙청, 교수 단체의 조직 등 학원 민주화의 실현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4·19 혁명 시기 대학 교수단의 데모는 서울, 대구, 부산에서 전개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 집단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던 대학 교수들의 데모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