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노덕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355
한자 盧德述
영어음역 No Deoksu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친일파
성별
대표경력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
출생 시기/일시 1899년 6월 1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0년 9월 - 경상남도 순사교습소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20년 6월 - 경상남도 순사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9월 -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울산경찰서 사법계 경찰부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2월 - 경부보로 승진해 의령경찰서 경부보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0월 - 김해경찰서 경부보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거창경찰서 경부보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8월 -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2년 7월 - 경부로 승진해 울산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2년 8월 -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2월 - 인천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4년 2월 - 양주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1월 - 개성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3월 - 훈8등 서보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6월 - 종로경찰서 경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3년 9월 -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4년 6월 -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4년 12월 - 조선흥행협회 이사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월 -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 -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0월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핵심 관계자 암살 모의
활동 시기/일시 1949년 1월 - 반민족 행위 혐의자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49년 7월 - 병보석으로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서울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5년 11월 -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뇌물 혐의로 회부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 받고 파면
몰년 시기/일시 1968년 4월 1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울산광역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울산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울산시광역시 중구 북정동 4
활동지 부산광역시
활동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경상남도 통영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친일 경찰.

[활동 사항]

노덕술(盧德述)[1899~1968]은 1899년 6월 1일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성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하였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하였다. 그 후 울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에서 일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취직을 위해 홋카이도[北海道]에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 6월 경상남도 순사로 임명되었다. 1920년 9월 경상남도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였다.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경찰부장으로 재직하였다. 1924년 12월 경부(警部) 및 경부보(警部補) 시험에 합격해 경부보로 승진하고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 주임을 지냈다. 1925년 10월 경상남도 김해경찰서 경부보, 1926년 거창경찰서 경부보,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 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 1928년 6월 동래고등보통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동맹 휴학을 주도한 흑조회 관련자인 김규직(金圭直)·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그리고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공표(朴孔杓)[박일형]를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1928년 12월 조선 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1929년 12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차일명 등이 광주 학생 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 휴학을 일으키자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1931년 8월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 주임,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해 울산경찰서 경부, 8월에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 경부,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1941년 6월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하였다. 1943년 9월 경시(警視)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6월 전시 체제하에서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 12월 조선흥행협회 이사를 지냈다.

해방 후 1945년 8월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월남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재직 중 장택상(張澤相)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하고 시체를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수도경찰청 부청장의 신원 보증으로 일시 석방되자 도주하였다. 1948년 10월 도주 중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하였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반민족 행위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이 무렵 노덕술 등에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관계자에 대한 암살 지시를 받은 백민태의 자수로 암살 모의 전모가 밝혀졌다.

1949년 4월 고문치사 사건으로 서울지방법원에서 검찰이 3년을 구형하였으나 무죄가 선고되었다.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관계자 암살 모의 혐의와 관련해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7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에 의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검찰의 공소로 열린 대법원 판결에서도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후 헌병으로 전직하여 1950년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 1955년 서울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지냈다. 1955년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뇌물 혐의로 회부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 받고 파면되었다.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8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