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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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魯璣柱 |
영어음역 | No Giju |
이칭/별칭 | 강본정명(江本正明),오니게이부[鬼警部]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호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지역에서 경찰 관료를 역임하였던 친일파 경찰이자 경제인.
[개설]
노기주(魯璣柱)는 일제 강점기 말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경찰로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제1·2차 대구 반전 반제 격문 살포 사건에 관여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으며, 귀환 일본군 환송연, 위문 금품과 의연 금품 모집, 국방 사상 보급 선전, 시국 관련 언론 취체 등의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해방 후에는 부산 소재 조선경질도자기주식회사의 관리인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이름은 강본정명(江本正明)이다.
[활동 사항]
1896년 2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난 노기주는 1914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 본교를 졸업하였고, 1년 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1919년 5월까지 평양제일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재직하였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담임이었던 일본인의 소개로 1921년 3월 경상북도 경찰부 위생과 경무보로 근무하였다. 이후 1923년 7월 경주경찰서, 1929년 5월 상주경찰서, 1930년 10월 선산경찰서 등에서 경부보[사법계 주임]로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노기주는 대구경찰서 경부로 승진하였고, 여기서 대구 보병 제80연대 부근과 대구역에서 제국주의 침략 전쟁 반대를 내용으로 한 제1차 대구 반전 반제 격문 살포 사건으로 체포된 서오룡, 서상조, 현준역, 권태우 등과 송명근, 우해운 등의 제2차 대구 반전 반제 격문 살포 사건 관련자 40여 명에 대한 수사에 관여하였다. 1933년 7월에는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 겸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 그리고 1936년 12월에는 경기도 경무과 경부 겸 조선총독부 경찰관강습소 조교수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3년 3월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 수송보안과장이 되어 부산에서 근무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에 노기주는 경상남도 경무국 총무과장, 경상남도 경찰부 차장에 이어, 1946년 2월에는 경상남도 경찰부 경찰부장[경찰청장]에 임명되었다. 4개월 후인 1946년 6월에 퇴직하고 부산에 있는 조선경질도기주식회사의 관리인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1949년 7월 6일 특별검찰부로부터 징역 2년형을 구형받았으나, 1949년 7월 12일 무죄 평결을 받았다.
노기주는 태평양 전쟁 중 경상남도 지역에서 순회 연설을 하며 징용과 징병을 강요하는 등 뼛속까지 철저하게 일본화된 것으로 평가 받았고, ‘오니게이부[鬼警部]’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과는 달리 재판 과정에서는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이종현이 그가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다고 증언하는 등 우호적인 반론이 나왔다. 또한 노기주가 평소 온순한 성격으로 민족 운동에 끼친 해가 없었다며 선처를 바라는 진정서도 연명으로 제출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되어 노기주도 풀려나면서 조사가 마무리되지 못하여 고문 여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경상북도 경찰부 위생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3년 5월에 일본인의 조선어 습득을 돕기 위해 훈도 시절의 경험을 살려서 조선어 문법 등을 수록한 『조선어법 상해』를 발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43년 8월에 훈7등 서보장을 받았다.